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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진정성 내지 쿨함

bravebird 2018. 6. 21. 13:19

예전에 조지 오웰 '정치와 영어'와 관해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안 좋아한다. 왜냐면 그게 대체 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냥 자기가 느끼기에 좋고 옳고 특히나 쿨해 보이면 붙이는 수식어 같다. 왜 진정한지, 뭐가 진정하다는 건지 설득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그 대상에 너무 크고 자의적인 의미를 부여해버린다. '진정성 있는 소설'이라는 비평은 직업적으로 너무나 게을러 보인다. 


또 신기한 것은, 진정함이란 건 절대적일 텐데도 덜 진정하고 더 진정하다는 식의 우열 비교가 가능하다. 브로콜리 너마저나 장기하는 원래 자기들만 아는 진정한 인디 뮤지션이었는데 오버로 올라와 돈을 벌고 유명해지니까 실망했다면서 팬질을 그만둔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덜 알려지고 헝그리하고 그래서 더 진정성 있는 것만 같은 밴드를 다시 찾아다닌다. 


결국 '진정함'은 '쿨함' 정도의 의미인 듯 하다. 이 '쿨함'은 보통 주류에 반하는 것이라서 당시의 주류가 무엇인가에 따라 내용이 자꾸 변한다. 한때 쿨했던 것들과 이제 떠오르는 쿨한 것들을 비교하고 저울질할 수 있다. 더 쿨한 것을 가져서 나와 남을 구별지으려는 인정투쟁이 가능하다. 


나도 그 경쟁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쿨함과 진정함의 그림자를 자꾸 좇아다닌다. 지겨운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여기보다 어딘가에 "리얼 라이프"가 있을 것만 같다고 자꾸 생각한다. 회사를 그만둔다면 해보고 싶은 게 (뻔하게도) 세계여행인데 그 지역도 뭔가 너무나 진정할 것만 같은 아시아 저개발 국가들이다. 인도나 네팔에 많은 히피들, 티베트의 순수(할 듯)한 영혼을 찾아온 여행자들, 회사 때려치고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넘고 싶은 나. 전혀 다를 게 없지만 뭔가 다르고는 싶다. 나도 별수없이 쿨함 경쟁의 일부분이다.


다만 쉽게 '진정함'을 갖다붙이는 건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난 애초에 진정하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안 잡힌다. 무언가의 본질적인 정수, 이데아 같은 걸 의미한다면 분명히 추상적일 것이다. 내가 그런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싫든 좋든 나한테 그나마 확실한 건 지금 여기다. 진정함은 모르겠지만 엄연함은 알겠다. 비록 권태롭지만 하루에 10시간 가까이 매일 보내는 일터, 6시 반 기상과 12시 취침, 채워야 할 배와 빨아야 할 옷과 돌봐야 할 빌린 집, 갚아야 할 대출, 싫든 좋든 상대해야만 하는 이런저런 사람들 같은 것이 내 생활 대부분을 차지하는 엄연한 현실이다. 확실히 쿨하지 않은 그 무엇들이다. 그렇지만 어차피 진정함이 뭔지 평생 모를 거라면, 쿨함이란 놈도 미꾸라지처럼 자꾸 내 손을 빠져나갈 거라면, 안 쿨하지만 엄연한 매일을 무심히 살아나가는 것이 내게 최고의 쿨함일 거다. (무심함은 심지어 쿨함의 핵심임!)


2학년 때 전공이 너무 지긋지긋했었다. 마치 정답인 것만 같은 다른 전공으로 쿨하게 바꾸어 봤자 역시나 지겨워졌다. 어차피 지겨울 거라면, 그래서 안 쿨할 매일라면 그냥 받아들여 버리는 쿨함이여 내게 함께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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