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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사법 이야기 (1) - 홍콩의 외국인 판사

bravebird 2017. 4. 10.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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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법조계에서 외국인 판사의 존재를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외국 국적자는 고사하고, 한국으로 귀화한 판사조차도 아직은 상상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반면 홍콩에는 외국인 판사가 존재합니다. 홍콩에서 태어난 외국 혈통 판사도 있고, 아예 외국에서 초빙해 온 푸른 눈의 판사도 있습니다.


Roberto Ribeiro라는 판사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포르투갈 혈통을 갖고 있지만 홍콩에서 태어나고 초중고 교육을 받은 후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했습니다. 그는 현재 한국의 대법원 격인 홍콩 종심법원(Court of Final Appeal)에서 상임 판사로 재직 중입니다. Kemal Bokhary라는 판사도 있습니다. 이 사람 아버지 Daoud Bokhary는 파키스탄 서북변경주의 페샤와르 출신으로, 일본 식민 통치가 끝난 후에 영국령 인도 육군 소속으로 홍콩에 들어왔습니다. 부두 관련 사업을 하다가 데이 트레이딩 회사인 Bokhary Securities를 차린 기업가이지요. 어머니 쪽 가족은 19세기부터 홍콩에 거주했습니다. Bokhary 본인은 홍콩 카우룬 반도 출신으로 홍콩 시민권을 갖고 있으며, 현재 홍콩 종심법원의 비상임 판사로 재직 중입니다. 이 둘은 외국 혈통을 갖고 있기는 해도 모두 홍콩 시민권자죠. 


David John Dufton은 다릅니다. 이 사람은 영국 국적자로 홍콩에서 일하는 판사인데 최근 세간의 화제였습니다. 센트럴 점령 당시인 2014년 10월 15일, Ken Tsang이라는 사람이 시위 참가자들을 해산시키고 있는 경찰관들에게 모종의 액체를 뿌리며 시위했습니다. 그는 곧 경찰에게 손을 묶이고 얼굴에 최루액을 분사당한 후 경찰 7명에게 구타당했습니다. TVB 방송국에서 이를 촬영하여 공개하면서 파문이 확산되었습니다. Ken은 2016년 5월에 경찰 공격과 체포 거부를 이유로 5주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경찰들은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피해자에게 실제적인 신체 손상을 입힌 것을 이유로 올해 2월에 2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건 당시 경찰관들의 스트레스 정도를 반영하여 6개월 감형한 결과입니다. 이 판결을 내린 것이 바로 Dufton 판사입니다. 



Dufton 판사



 Ken Tsang 구타 장면



이후 중국 본토에서는 Dufton이 우산혁명 옹호세력이라며 비난 여론이 들끓습니다. 홍콩에서는 친중파와 민주파 사이에 여론이 갈렸습니다. 친중파는 2년형이 너무 가혹하고 우산혁명 세력에게 유리한 판결이라며 불만이었던 반면, 민주파는 홍콩의 법치주의를 존중한 판결이라며 지지를 보냈습니다. 일부 친중파 인사는 Dufton 판사가 흰 피부에 노란 심장(우산혁명의 상징색)을 가졌다며 인종주의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Dufton 판사의 신변을 위협하는 발언도 쏟아졌죠. 이에 법무국 국장(우리나라의 법무부 장관격) Rimsky Yuen은 법치주의를 존중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 법치주의는 홍콩 시민들의 자부심입니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홍콩특별행정구의 헌법 역할을 하는 기본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 홍콩 기본법은 일국양제의 전제 하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주권 반환 이전의 법률 체계를 존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반환 이전의 법률 체계란 바로 영국의 관습법(Common Law, Anglo-American Law) 체제와 법치주의 원리입니다. 영국과 미국을 필두로 한 영국의 옛 식민지를 위주로 널리 퍼져있는 관습법은 다들 아시다시피 독일, 일본, 한국이 채택한 대륙법(Civil Law, Continental Law)과는 달리 판례가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요. 중국 본토의 법계와는 다르기 때문에 이를 잘 운용할 수 있는 외국인 판사들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판사로 기용할 만한 로컬 법조인의 풀 자체가 작았습니다. 홍콩대학 법학과가 개설된 것이 겨우 1969년도입니다. 졸업 후 최소 10년은 변호사로 경력과 명망을 쌓아야 판사 임용 기회가 주어지다 보니 일러야 1983년부터나 로컬 판사들이 임용될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죠. 홍콩 반환이 이미 결정된 후인 1985년도에만 해도 80% 이상이 외국인 판사였고 로컬 풀은 빈약했습니다. 이 때문에 홍콩 반환 이후에도 외국인 판사가 존재해야 하는 근거를 기본법에도 명시해 두었습니다. 


Judges and other members of the judiciary of the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shall be chosen on the basis of their judicial and professional qualities and may be recruited from other common law jurisdictions. (Article 92)

홍콩특별행정구의 판사와 사법부 구성원들은 법적·전문적 자질에 기초하여 선발하며, 여타 관습법 적용국가에서 채용해올 수 있다. (제92조)


The power of final adjudication of the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shall be vested in the Court of Final Appeal of the Region, which may as required invite judges from other common law jurisdictions to sit on the Court of Final Appeal. (Article 82) 

홍콩특별행정구의 최종심 권한은 종심법원에 있으며, 종심법원은 여타 관습법 적용국가로부터 판사들을 초청할 수 있다. (제82조)


단 2012년부터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당시 새로 지명된 23인의 판사가 거의 다 로컬 출신이었습니다. 2015년도는 모든 심급의 법원을 통틀어 로컬 출신이 대다수를 점한 분수령이었습니다. 현재 홍콩 사법부 홈페이지에는 180명 정도 되는 판사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링크이 목록에 국적은 나와있지 않지만 거의 대부분이 중국 성씨를 갖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홍콩의 변호사 친구한테 물어보니 판사 임용은 상당히 명예로운 일이라고 합니다. 현재 홍콩의 변호사 중에는 실무 경험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 유학 경험, 게다가 타국의 변호사 자격까지 갖춘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비 판사의 풀이 작다고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홍콩에는 왜 여전히 외국인 판사가 존재할까요? 이들은 현재 홍콩에서 어떤 의미일까요? 


애초에 외국인 판사는 로컬 법조인 풀 자체가 작았던 시기에 인력 충원이라는 실제적 이유 때문에 기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법치주의의 수호를 위한 상징적 존재로서의 역할이 큽니다. 영연방 관습법 적용 국가인 영국, 호주, 뉴질랜드에서 수입되는 이들은 공정성과 전문성, 그리고 풍부한 경험을 모두 갖춘 존경할 만한 판사로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인 견해에 영향을 받지 않고 법리와 보편 가치에 입각해서 판결을 내린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이들의 존재는 홍콩의 자치를 위협하는 중국 중앙 정부에 맞서 홍콩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한 보루로 여겨집니다. 현재 홍콩의 최종심급 법원인 종심법원에서도 재판 시 외국인 판사를 둡니다. 재판 때 5명의 판사를 두게 되어 있는데, 이 중 1명은 사법부 수장(Chief Justice) 혹은 그가 지명한 1인, 3명은 상임 판사, 나머지 1명은 외국인 비상임 판사를 배치합니다. 이 1명은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경험과 전문성을 통해 법리 검토 등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또한 외국인 투자자들의 입장에서는 외국인 판사의 존재가 사법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과 판결의 공정성을 담보합니다. 따라서 투자 유치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싱가포르에서도 2015년도에 Singapore International Commercial Court(SICC)를 설치해서 외국인 판사들을 기용하여 관련 이슈에 대한 전문성 확대를 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홍콩과의 지역 라이벌 구도에서 싱가포르 쪽으로 힘을 실어주는 포석입니다. 홍콩에서는 중국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고 50년간의 체제보장 종료 후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죠. 국제금융자본 유치를 위해 법정에 외국인 판사를 둔다는 발상은 IMF 금융위기를 경험했던 우리로서는 상당한 거부감이 들지만 홍콩과 싱가포르는 다른가 봅니다.


중국 중앙정부와 친중파로서는 이 외국인 판사의 존재가 못마땅합니다. 올해 중국 양회에서는 홍콩 사법부의 로컬라이제이션이 너무 늦게 진행되고 있다는 성토가 있었습니다. (링크) 이 외국인들이 영국, 호주, 뉴질랜드 출신 백인뿐이라는 것도 문젯거리입니다. 인종주의라는 것이지요. 중국인들이 백인의 법을 이해 못한다는 의심 때문에 백인 판사들을 쓰기 시작한 거라면서, 조계지에 치외법권 달라고 하던 것과 뭐가 다르냐는 것입니다. 또한 백인 투자자들한테 어필하는 것이니 온통 백인들 좋으라는 것 아니냐는 입장입니다. 특히 헌법적 쟁점을 건드리는 재판건에 외국인 판사를 기용하는 것은 중국의 주권에 대한 침해라고 주장합니다. Ken Tsang 구타사건에 대한 2년형 판결이 중국에서 커다란 비난여론을 일으킨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외국인 판사들이 홍콩 분리독립 세력을 옹호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지요. 


법치주의와 외국 투자자 유치, 그리고 무려 홍콩의 '자치'를 위해서 '외국인' 판사를 두다니. 영국 식민지였다가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의 이중적 식민성은 이처럼 홍콩 기본법과 사법 제도에 반영되어 끊임없이 정치적 파문을 일으킵니다. 로컬과 보편의 모순, 주권과 인권의 갈등 문제가 가장 보수적인 사법 분야에서조차 현저합니다. 중앙 정부 대 외국인 판사라니 우리나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구도죠. 국인 판사의 존재는 식민 통치의 유산일까요, 아니면 사법 독립을 위한 보루일까요? 로컬 국가(중국)의 주권과 보편 원리(법치주의)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요? 이번에도 홍콩은 거대한 흥밋거리를 던져주고 취침시간을 늦추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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