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중앙아시아 탐험가 (36)
독수리 요새
표트르 코즐로프는 러시아의 실크로드 탐험가 중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와 함께 제일 유명하다. 프르제발스키가 발탁한 제자이자 동행이었다. 심지어 둘은 비밀 연인(!)이었을 거라는 설이 프르제발스키 전기에 등장할 만큼 각별한 관계였다. 프르제발스키는 평소에 자기 부하가 결혼을 하면 실연당한 것처럼 질투하고 슬퍼하며 결혼을 매우 막았다고 한다. 덕분에 동성애자였다는 추측을 많이 받는다. 여하튼 코즐로프는 프르제발스키 사후에도 독자적인 탐험 활동을 계속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특히 고비 사막의 버려진 도시 카라 호토(흑수성)를 발굴해 내어 서하 왕조(1038–1227)의 전모를 밝히는 데 기여했다. 카라 호토는 서하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서하는 티베트·강족 계통의 탕구트인이 북중국 고비 사막에 세운 국가다..
1888년에 프르제발스키의 5차 탐험대는 카라콜 이식 쿨 근처에서 출발 준비를 마쳤으나 프르제발스키가 갑자기 사망했다. 탐험대는 이듬해 봄에 출발했다. 지리학회는 새로운 탐험대장으로 미하일 페브초브를 선임했다. 미하일 페브초프 준가르 사막에서페브초프를 탐험대장으로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두 차례의 중앙아시아 탐험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프르제발스키처럼 그 역시 군인이었으며 합동군사참모대학을 졸업했고 어렸을 때부터 탐험을 꿈꿨다. 기분 좋은 행운이 젊은 대장을 도왔다. 1876년에 그는 자이산에서 중국 신장 치타이 현으로 가는 카라반을 지키는 카자크 100명을 이끌어줄 것을 제안받았다. 그 길은 준가르 사막의 스텝 지역에 있었는데, 페브초프는 정확한 좌표가 표시된 이 지역 상세 지도를 최초 제..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의 탐사 범위는 거대한 중앙아시아 전체를 포함하진 못했다. 몽골, 중국 서부 및 티베트 영토에는 유럽인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영역이 많이 남아 있었다. 프르제발스키와 동시대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다른 유명 탐험가들이 이 범접하기 어려운 지역을 조사했다. 중앙아시아 탐험프르제발스키가 두 번째 탐사를 시작한 1876년에 지리학회는 또다른 중앙아시아 탐험대를 꾸렸다. 북서부 몽골 조사가 그 목적이었다. 세 탐험가가 자이산에서 출발하여 몽골 알타이 산맥을 넘고 콥도에 도착했다. 탐험 대장은 전직 장교인 그리고리 포타닌이었다. 그는 갓 30세에 징역과 추방 등 많은 일을 겪었다.그리고리 포타닌 포타닌의 운명그리고리 포타닌은 옴스크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서 복무했으며, 이후 페테르부르크 대..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는 거의 20년간 중앙아시아의 산, 스텝, 사막을 조사했다. 중앙아시아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프르제발스키 이전까지는 유럽인들 중 그 누구도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다. (역자주: 사실 스웨덴 사람인 요한 구스타프 레나트가 1700년대 초반에 이미 준가르에 볼모로 잡혀서 로프 노르 인근에 간 적이 있다. 태그 누르면 이전글 확인 가능.) 네 번의 탐험 동안 프르제발스키는 말 위에서, 그리고 도보로 3만km 이상을 소화해 냈다. 세묘노프의 추천 프르제발스키는 군인이었다. 어렸을 때는 보병 연대에 복무했지만 탐험을 꿈꿨다. 1861년에 합동군사참모대학에 입학하여 첫 번째 지리학 저작인 《아무르 지방의 군사통계학적 개설》을 썼다. 이 저술 작업을 하면서 프르제발스키는 도서관에서 찾을 수..
지질학자 이반 무쉬케토프(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Мушкетов) 또한 중앙아시아 연구자 중 하나였다. 그의 탐험은 지질학적 발견뿐 아니라 여러 흥미롭고 중요한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 이반 무쉬케토프 은메달페테르부르크에서 산림 학원을 막 끝낸 22세의 무쉬케토프는 1872년에 첫 번째 탐험을 떠났다. 그는 우랄 지방에서 기존에 러시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광물 세 가지를 발견했다. 그는 곧 투르키스탄으로 떠났는데, 투르키스탄은 당시 중앙아시아 전체를 일컬었다. 무쉬케토프는 1875년에 서부 및 중부 톈산을 넘었으며, 이식 쿨 호수에 들렀고, 고산 지대에 위치한 송쿨 호수에 도달한 다음 산골짜기를 따라 내려왔다. 그는 고대 후잔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유연탄 산지를 조사하여 산업용으로 적합하다..
표트르 세묘노프-톈산스키에 의해 시작된 중앙아시아 연구는 다른 탐험가들이 계속해 나갔다. 니콜라이 세베르초프(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Се́верцов)와 알렉세이 페드첸코(Алексе́й Па́влович Фе́дченко)는 1870년대에 많은 업적을 세웠다. 목숨을 걸고니콜라이 세베르초프는 어렸을 때부터 동물학에 가장 관심을 가졌다. 모스크바 대학의 자연과학부에서 수학하던 당시, 논문 주제도 고향인 보로네쉬 지역의 동물군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젊은 학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57년에 톈산을 따라 여행하던 당시, 세베르초프는 아랄 해와 시르다리아 강 하류 지역을 연구하는 탐험대를 이끌었다. 이 지역은 코칸드 칸국에 속했다. 코칸드 칸국은 ..
8월 마지막주였던 이번 여름 휴가에 나는 아무 여행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러시아어 학원을 빠지지 않고 다녔는데, 대신 나름대로 휴가를 기념한다고 읽고 싶은 텍스트를 직접 가져가서 선생님이랑 같이 읽었다. 지금 학생이 나밖에 없고 선생님이랑 친해서 가능했다.201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돔 크니기에서 초등학생용 얇은 백과사전 시리즈인 《마하온(МАХАОН)》 몇 권을 사왔었다. 그 중 러시아 여행가들(Русские Путешественники)에서 중앙아시아 탐험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다. 혼자는 영 안 읽혀서 3년째 방구석에 박혀 있다가 선생님이랑 같이 읽으니 금방이었음. 단어가 지형에 대한 게 많아서 좀 어렵긴 했다. 책 전체는 정말 알차고 특별한 것이 시베리아, 북극, 알래스카, 캄차트카 반도, 중앙아..
2014년 겨울에 모스크바 갔을 때 칼미키아 사람들을 몇 알게 되었다. 어떤 바에 1주일 간격으로 두 번 찾아갔는데, 갈 때마다 마주쳤던 한 그룹의 친구들이었다. 생긴 게 내 친구랑 너무 닮아서 고려인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칼미크족이란다. 와, 오이라트 후손 아니냐고, 너무 반갑다고 반색을 했더니 그 쪽에서 더 놀라고 반가워 했다.이 사람들은 한 무리의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대여섯 명을 한꺼번에 알게 되었다. 덕분에 2015년에 다시 한번 모스크바를 갔을 때 또 만날 수 있었다. 이 중에 한 분이 몇 개월 전 내가 마침 핀란드 여행을 준비중일 때 만네르하임 사진을 올렸다. 중앙아시아 탐험 중에 찍은 오이라트인 사진들! 이 사진들을 다시 웹검색해서 러시아 블로그들을 찾아냈다. 원글 캡션에는 전부 칼미크인이라고..
아우구스투스 프레데릭 루돌프 회른레: 1821년 인도에서 태어남. 독일계 성공회 선교사의 아들. 런던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웠고, 당시 영국령 인도의 수도였던 캘커타에서 학문 연구. 인도 고문서 해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영국 편에서 고문서 수집 경쟁에 참여했다. 희대의 고문서 위조범인 이슬람 아훈에게 깜빡 속는 바람에 뻘논문까지 쓰게 되지만, 동료 학자들이 슬쩍 넘어가줌. 개이득~ (오렐 스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클릭)바우어 고사본 일부. 위키피디아 펌. (이미지 클릭) 바우어: 인도 육군 정보부 장교. 스코틀랜드 탐험가인 앤드루 댈글라이쉬(Andrew Dalgleish)를 청부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수색하던 중, 굴람 카디르라는 현지인으로부터 51매의 자작나무 껍질로 된 문서를 사서 캘..
■ 장소 헬싱키 대학 - Orientalica Collection에 만네르하임 일기 원본과 중앙아시아에서 수집한 서적 소장. 만네르하임 박물관 - 임종 시까지 살았던 생가. 중국에서 가져온 물건들 소장. Museum of Cultures - 극동아시아 전시관에 만네르하임 아시아 컬렉션 소장. 다른 핀란드 탐험가들의 물건들도 있음. Hietaniemi 공동묘지 - 만네르하임이 묻혀 있음. National Archives of Finland - 만네르하임의 사적 기록 소장. National Board of Antiquities in Helsinki - 만네르하임의 아시아 사진 소장. 헬싱키 대학 도서관, National Board of Antiquities, National Archives of Finl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