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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구둣방 아저씨

bravebird 2018. 1. 12. 10:27

보너스가 들어왔다. 애초에 기본급이 형편없는데 올해는 인상분도 없다. 난 그런 연봉계약서 싸인한 적 없음. 보너스도 삭감돼서 연봉 총액이 떨어졌다. 아니 일을 5년 했는데 연봉이 처음보다 내리다니? 심지어 신입사원보다 우리 연차가 적게 받는다니? 돌았나 이게? 제정신인가?   

분기탱천해서 오늘 태업하려고 마음먹었다. 딴소리나 해야겠다. 


난 우리 동네 구둣방 아저씨 팬이다. 신발을 맡기면 척 보고 딱 알고는 죽죽 뜯어서 척척 자르고 탕탕 친 다음 꽁꽁 꿰매버린다. 손놀림에 빨려든다. 신이 난다. 손기술만 뛰어난 게 아니라 평소 어떻게 걷는지 순간 파악하고 신발모양 보완까지 해주신다. 눈썰미와 판단력이 있는 것이다. 새 부츠 밑바닥이 얇아 발병이 나서 찾아갔더니 '남자친구 품에 처음 안기듯이 폭신하게 만들어줄껴!' 하시고는 ㅋㅋㅋㅋㅋㅋ (대폭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완전히 새로운 신발로 만들어 주셨다.

아저씨는 수제화 제작, 신발회사 임원 등 신발 관련 경력을 모두 거쳐서 지금은 직접 수선을 하신다. 실력에 대한 자신감과 프로정신이 대단하시다. 2년차 때쯤마치 그때만 그랬던 양 일이 지루하고 거지 같아서 때려치고 싶었는데 아저씨 손놀림을 보고는 말문이 막혔다. 아 난 멀었구나. 저 경지에 닿기까지 반복 훈련으로 꽉찼을 시간 앞에 그저 Hats off. 그지 깽깽이 같아도 좀더 버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는 싫어도 숙련은 멋진 일이니까.

장인들의 리드미컬한 손놀림은 경이롭다. 날카로운 눈썰미가 부럽다. 그 경험과 실력을 갖기까지 거쳤을 지겨운 훈련의 시간을 존경한다. 난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몸뚱이가 하나고 시간이 24시간이기 때문에 잘 선택해서 집중해야 한다. 꿈은 거창하고 간지나게 가져보아도 좋다. 그렇지만 잘하려면 결국에는 작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쪼개서 양치질 하듯 매일 조금씩, 그냥 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결국 시간 + 반복 + 체화의 3위일체다. 이걸 전부 생략하고도 잘하고 싶다면? 간단하다. 사진 기술을 연구해서 SNS 세계로 진출. 

아저씨는 능청스럽다. 며칠 전 비치는 검정 스타킹을 신고 갔더니 오늘 뭐 이렇게 예쁘게 입고 왔냐면서 어김없이 농담을 거셨다. 느이 엄마가 맡긴 신발 너 때문에 야근해가며 싸게 고쳐주는 거니까 끝나면 엉덩이 한대 때릴 거라고 껄껄껄 ㅋㅋㅋㅋㅋㅋ 회사였으면 삼천만원짜리 드립 자제요 했겠지만 나는 사람을 차별하니까 아저씨는 상관없다. 이날 아저씨는 엄청난 바느질 솜씨로 내 눈구멍과 악관절에 상당한 무리를 선사하셨다. 결국 엉덩이는 아니고 종아리 한 대 맞아드림 ㅋㅋㅋㅋ 

그 구둣방에는 장자 책이 오랫동안 놓여있었다. 아저씨는 노장사상을 좋아하신다. 유교 선비 놈들은 맨날 효도하라 그러고 틀에 얽매여서 싫으시다고. 노자 장자는 해학도 있고, 그냥 멀쩡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효도하는 거라니까 좋다고. 최근에 드디어 노자를 읽었으니 장자도 읽으면 놀러가야겠다.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이중톈 중국사 6권 백가쟁명 편을 보면 무위로써 유위를 추구하는 게 노자, 무위로써 무위를 추구하는 건 장자, 유위로써 유위를 추구하는 게 묵자, 유위로써 무위를 추구하는 게 선불교라고 한다. 나는 이 중 유위로써 무위를 추구하는 선불교적 장잉정신을 발휘하고자 한다. 

우리 업계를 모르는 신임 사장이 취임했다. 정성이 배어나오게 해서 감동을 시키라는 고전 명구를 전사 직원에게 인쇄해서 나눠줬는데... 아 됐고요. 구둣방 아저씨를 본받아 지극히 신명나고 정성스럽게 갖가지 취미나 발전시켜 보이겠다. 매해 연봉을 후려치는 곳에 영혼을 갖다바쳐 개미처럼 충성하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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