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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사표에 나오는 신기한 한자

bravebird 2023. 9. 28. 01:27

요즘 한문을 중문과 수업에서도 사기 강독 모임에서도 열심히 배워보고 있는데 정말 재밌다.

한자가 무궁무진하게 많고 그 하나하나가 뜻도 다양하다. 현대한어와 뜻이 똑같은 경우도 있고 달라진 경우도 있어서 서로 비교하며 익히면 재밌다.

 

아래는 출사표에서 중요한 표현들로 선생님이 골라주신 것들인데 전혀 몰랐던 한자들이 많아서 찾아보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陟(척)'은 '오르다, 승진하다'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처음 보았다.

 

妄自菲薄(망자비박) : 함부로 재주가 모자라다고 생각하다.
陟罰臧否(척벌장비) : 잘한 일은 상주고 잘못한 일은 벌준다.
猥自枉屈(외자왕굴) :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굽히고 왕림하다.
庶竭駑鈍(서갈노둔) : 보잘것 없는 역량을 다 발휘하다.
攘除姦凶(양제간흉) :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물리치고 제거하다.
諮諏善道(자추선도) : 좋은 방법을 자문하고 물어보다.
斟酌損益(짐작손익) : 정치적인 손해와 이익을 잘 가늠하다.
臨表涕零(임표체령) : 표문을 지어 바침에 있어 눈물이 떨어진다. 

 

 

이 글자는 옥편을 찾아보니 서로 관련없어 보이는 뜻이 한가득이다. 착하고 좋은 거랑 뇌물이랑 대체 무슨 관계인지 ㅋㅋㅋㅋㅋㅋㅋ 뇌물이랑 창고랑 감추다 숨기다는 연관이 있어 보이긴 한다. 또 종이나 노복은 앞에 두 의미랑 대체 무슨 관련인 건지. 또 현대한어 어휘에서는 본 적이 없는 글자이다. '숨다, 저장하다', 또는 '티베트'라는 의미의 '藏'자는 저 위에 풀초머리 부수가 들어간다. 隐藏, 收藏, 储藏, 贮藏, 埋藏, 西藏, 藏族...

 

이 글자는 옥편에서 찾았을 때는 낯설었는데 뜻을 하나하나 읽다 보니까 비교적 익숙한 현대한어 어휘 冤枉이 떠올랐다. 뜻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때까지 '짐작'이 한자어인지도 몰랐는데 글자 하나하나를 찾아보고는 너무 놀랐다.

'작' 자는 우리가 '대작하다', '자작하다', '수작부리다' 또는 '작부' 같은 단어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술 따르다'라는 뜻이다. 근데 술따르는 게 짐작이랑 대체 무슨 관계임? 그리고 심지어 '짐' 자도 '술 따르다'라는 의미였다. 그 외에도 굉장히 의미가 다양하게 많은 글자였다. 옥편 찾아보고 놀랐다.

 

옥편 검색 결과 (짐)
중국어사전 검색 결과 (짐)
옥편 검색 결과 (작)
중국어사전 검색 결과 (작)

'술따를 작'자가 들어가는 어휘 중에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들. 이 중에 짐작, 참작, 작정 같은 것들은 술따를 작 자를 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단어들이다. 대체 이 글자는 의미가 왜 이렇게 뻗어나간 건지 궁금해져서 ChatGPT에게 물어보았다.

 

'술을 따르다'라는 즉자적인 의미가 '(마치 잔에 조심조심 술을 따르듯이) 심사숙고하다'라는 은유적인 의미로 발전한 결과라고 한다. 나는 한자나 언어 일반의 이런 면이 너무 재미있다. 인간의 사고와 문명이 발달하면서 1차적이고 즉자적인 의미가 점차 추상화되고 고도화된 과정을 보여준다. 상징이나 비유는 인지에 관한 것이라 상당히 흥미로운 분야이다.

 

 

涕 자는 출사표에서는 '눈물(을 흘리다)'로 나오는데 현대한어에서는 '콧물'의 의미로만 접해보았다. 현대한어에서 '눈물을 흘리다'는 流眼泪(=淚), '콧물을 흘리다'는 流鼻 이다. 현대한어에서는 流鼻涕라는 구 자체를 덩어리로 외워버리니까 涕만의 원래 뜻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이다.

 

현대한어 단어들은 주로 쌍음절화가 많이 이루어졌다. 반면 옛 한문에서는 한자 한 글자 한 글자가 곧 단어이다. 현재와 완전히 동일한 다음절 어휘는 소수이다. 그래서 한문을 해석해 내려면 한자 하나 하나의 원래 의미를 집요하게 캐내야만 하기 때문에 그냥 무심결에 덩어리로 배운 현대한어 다음절 단어에 대해서도 분석적으로 접근할 수가 있다.

 

어쨌든 나는 죽었다 깨나도 이번 생엔 언어에 큰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다. 이런 게 재밌기도 하고 적성에도 맞고 잘하고 싶은 의욕도 많은데 해도해도 끝도 없는 분야라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돈을 바짝 다 벌어놓고 은퇴하고 나면 이런 것만 했으면 좋겠다. 더이상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해서 내 시간과 체력을 팔아야 할 필요가 없는 노후를 맞이하면 개인 공부 겸 소일거리로 역사 공부를 하고 한문 번역을 하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더이상 좋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했었다.

 

근데 왠지 그렇게 될 것 같다. 왜냐면 생각한 것을 실천에 옮겼는데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스승을 찾든 공부 모임의 기회를 찾든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서 계속할 수만 있다면 정말 그대로 되어버린다. 도합 20년이 넘도록 학교를 다니고 있고 10년 넘게 직업 생활을 했지만 이 정도로 오래 지속되는 재미는 드문 경험이었다. 모든 언어가 그렇지만 특히 한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고 너무나 오래되어 글자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얽혀있어서 심히 오묘하다. 나는 한자나 중국어가 그 유용성 여부나 그 종주국 정부의 작태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재밌어서 지금껏 해왔다. 정말 잘하고 싶은데 많이 부족해서 갈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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