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와호장룡 본문
와호장룡은 제가 중국어를 배우게 만든 인생 영화입니다.
고2에서 고3 올라가는 겨울에 밤 11시까지 공부하고 나서 영화 하나 보고 자는 하루하루를 반복했는데 그때 처음 봤습니다. 한 10년 전이지요. 오늘 오랜만에 다시 봤어요. 개인적인 의미가 많은 영화이니만큼 지난 10년을 잘 보냈나 테스트도 해볼 겸 자막 없이 봤습니다. 잘 안들리는 부분은 중국어 자막을 참조해가며 보았습니다. 이 훌륭한 영화를 거의 원어로 볼 수 있게 해준 지난 10년의 시간이 정말로 감격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헛살지 않았네요. 전 지금 젊고 욕심이 많기 때문에 나중에 어리석었다고 후회할지언정 이 성취감을 뽐내지 않고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습니다. 대놓고 자랑이지만 이해해 주실 거죠? ㅎㅎㅎ 이건 사실 뒤에 하려는 이야기와도 이어집니다. 이 아래부터는 완전히 스포입니다.
와호장룡에는 굉장히 흥미롭고 매혹적인 인물이 나옵니다. 장쯔이가 연기한 옥교룡입니다.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죠. 부유한 명문가에 태어나서 미모와 교양을 겸비했고, 유모 벽안여우(정패패)한테 몰래 배운 무공까지 대단한 은둔 고수입니다. 정략결혼을 앞둔 옥교룡은 어느 날 수련(양자경)이라는 강호의 무림고수를 우연히 만나 동경하게 되고, 수련이 가져온 이모백(주윤발)의 청명검에 마음을 빼앗겨 몰래 훔쳐내게 됩니다.
옥교룡은 고관대작 부인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진 삶과, 소설 주인공처럼 거침없이 강호를 주유하는 삶 속에서 갈팡질팡합니다. 둘 중 무엇이든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무엇 하나 모자란 것이 없습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누구보다도 자유를 갈망하고 그 누구보다도 얽매여 있습니다. 청명검을 훔쳐냈는데도 그렇게 동경하던 강호로 가지 않고 그냥 잠깐 갖고 놀다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한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장에서 사랑을 약속한 반천운(장첸)이 찾아왔는데도 거절해 버리고, 원하지도 않으면서도 제 발로 결혼 가마에 오르는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결혼은 반천운의 훼방으로 무산됩니다. 청명검을 다시 훔쳐내 강호로 나가게 된 옥교룡은 그야말로 고삐가 풀려 가는 곳마다 무법천지를 만들어놓습니다. 이모백은 수양이 덜 되어 고집이 세고 거칠지만 재능이 대단한 옥교룡을 제자로 거두어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옥교룡은 굽히지 않습니다. 결국 옥교룡의 고집은 이모백과 벽안여우를 외나무다리에서 맞닥뜨리게 만들어 둘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반천운 역할의 장첸!! 섬뜩하게 잘생겼다. 신장 마적으로 나오지만 차림이나 외모는 티베트 스타일에 근접.
화염산 근처인 듯한 황야에서 옥교룡이랑 쫓고 쫓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는 중국 서역 배경의 이런 서부극 같은 요소를 엄청 좋아한다.
이모백은 죽기 직전에 자기 번민의 실체를 직시합니다. 무림고수가 되기 위해 오랫동안 자제할 수밖에 없었지만 수련을 깊이 사랑해 왔다고요. 둘은 그제서야 스스로의 마음을 직시하고, 이모백은 수련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둡니다. 옥교룡이 해독제를 구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수련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모백을 죽음으로 몬 옥교룡의 목을 베어버리려다가 칼을 멈춥니다. 대신 반천운이 무당산에 가있다고 알려줍니다. 거기 가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기 바란다고요. 그곳에서 옥교룡은 반천운도 뒤로하고 모든 것을 다 놓아 버립니다.
결핍이 없다는 점 자체가 결핍인 아이러니. 모든 것을 다 가졌기 때문에 가장 얽매이는 아이러니. 교룡은 이렇게 아이러니에 휩싸여 있는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찬란한 능력과 욕심과 고집, 그로 인한 교만함과 미숙함과 어리석음 모두가 젊음의 상징 그 자체입니다. 저도 옥교룡만큼이나 욕심이 많고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쉽게 떨치지를 못하는 어리석은 젊은이입니다. 반대로 수련과 이모백은 고수가 되기 위해 엄숙히 자제하고 정진해야 한다는 또다른 종류의 집착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을 직시하지 못해서 후회를 남긴 이들이고요. 이렇게 와호장룡은 소유와 자유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의 모습과 양극단이 거울처럼 서로 맞닥뜨리는 묘리를 기가 막힌 무술 장면과 영상미로 구현해 낸 걸작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때 보기에는 좀 일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拿得起,放得下(One can take something up or put it down with equal ease.)의 중요성을 실감을 할 일이 저는 많지 않았거든요. 그때는 청명검을 내려놓고 운무 속으로 뛰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야심차게 노력해서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스스로를 증명해서 자리를 만들어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요? 사실은 아직도 그럴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덤비고 부딪쳐 보렵니다. 반드시 어리석음을 남기겠지만요. (아 물론 옥교룡처럼 남의 물건 훔치고 객잔 다 부숴놓고 이러지는 않을 예정 ㅋㅋㅋㅋㅋ) 시간이 또 10년 흐른 후에는 어떤 생각을 하며 보고 있을지 많이 궁금한 영화입니다.
* http://blog.naver.com/pamina7776/220620663111 (옥교룡에 대한 흥미로운 블로그 포스팅)
* http://blog.naver.com/ped6009/40128926596 (와호장룡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엄청나게 기이한 산사. 직접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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