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알렉산드르 수마로코프, 《참칭자 드미트리》 본문
푸쉬킨의 〈보리스 고두노프〉처럼 동란시대에 대해 다룬 희곡. 선악구도가 상당히 단순하다. 슈이스키와 가짜 드미트리 1세(본명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 본업 수도자)는 실존 인물이지만, 슈이스키의 딸인 크세니야와 그 연인 게오르기는 가상 인물이다. 크세니야를 강탈하려는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악랄함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낸 인물 구도이다. 드미트리는 재고의 여지 없이 극악무도하고 크세니야는 더할 나위 없이 가련한 희생자여서 복잡다단한 심리드라마(예: 맥베스!!)를 보는 듯한 현대적 재미는 좀 떨어진다. 무대에 올리면 무대장치도 상당히 간소할 것 같다. 전투 장면 같은 것은 보여주기 방식이 아니라 말하기 방식으로 간단히 처리돼 있다. 폭력적인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고전비극의 전형적인 작법이었다 한다.
주목할 부분은 군주와 통치권력에 대한 혁명적인 관점.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측근으로 등장하는 파르멘은, 황가의 후예이더라도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통치자가 될 자격이 없고, 비록 가짜 드미트리라고 하여도 나라를 현명하게 이끌어갈 수 있으면 제위에 있을 자격이 있다는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달한다. 1700년대, 황제권력이 하늘을 찌르던 제정러시아에서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푸틴을 고분고분 지지하는 걸 보면 상당히 노예적인(ㅠㅠ) 것 같으면서도, 핏속에 이런 혁명성을 같이 갖고있는 모순적인 양면성. 이게 바로 러시아의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 희곡을 읽으면서도 역시나 싶었다.
추남이었던 가짜 드미트리 1세
이 희곡 범위에서는 벗어나는 내용이지만 잊을 수 없는 이야기. 가짜 드미트리 1세는 민중 봉기 속에서 친위대에게 살해당한다. 가짜 드미트리 1세의 등극을 도왔던 귀족 슈이스키는 그의 사후 황위에 올랐으며,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시체를 대포에 넣고 쏘아 올렸다.... ㅎㄷㄷ
+ 책으로부터 메모
러시아 귀족 계층은 크게 보야린(대귀족, 구귀족)과 드보랴닌(궁정 귀족)으로 나뉜다. 보야린은 세습받은 토지를 권력 기반으로 한 혈통 귀족이었다. 보야린 두마에 출석했으며 입법과 정책 결정에 관여했다. 드보랴닌은 키예프 루스 시대 이래로 공후의 궁정에서 봉사하며 생겨난 계층으로서 혈통 귀족과는 구별되었다. 작위는 없으나 인두세와 병역이 면제됐고, 농노 소유권을 부여받는 등 실질적인 특권을 누렸다. 15~16세기부터 모스크바 대공에게 봉사하는 소영주층인 드보랴닌 계층이 중앙집권 국가 발전의 지주로 등장했다. 18세기에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 의해, 관등표에 정해진 일정한 관직에 있으면 누구나 드보랴닌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보야린은 자연스럽게 드보랴닌에 흡수되었다. (p.4 참조)
※ 푸쉬킨의 〈보리스 고두노프〉에 대한 글은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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