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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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남아시아

장기 여행하면서 느낀 것

bravebird 2024. 7. 11. 17:03

첫 번째.

물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물건이 상하는 걸 굉장히 싫어해서 잃어버리거나 더러워지면 속상해 한다. 뭐든 흠집없이 고이 오랫동안 사용하려고 노력을 한다. 옷의 올이 약간 풀리거나 보풀이 생기는 것도 싫고 가방에 흙이 묻는 것도 싫다.

네팔과 인도에서 장기 여행을 하다 보면 도저히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없다. 풍상이란 것이 얼마나 강력한지 매일 느낀다. 모든 것이 먼지바람과 마찰로 쉽게 더러워지고 상해 버리며 이동이 잦기 때문에 잃어버리기도 쉽다. 여기 사람들은 풍상 앞에서 약간 포기했기 때문에 물건이 상해 버리거나 잃어버려도 그다지 속상해하지 않는다.

물건은 적당한 걸 취해서 한동안 유용하게 썼으면 그걸로 그만이다. 사라지거나 상하면 고이 잊어버리고 새로 사면 된다. 적당히 쓰고 나서 새로 얻으면 그만인 물건을 너무 고이 모시느라고 스트레스 받는 것은 바보 같은 짓.


친구 ST 고향집 유목 텐트. 있는 것들로 필요를 해결.




두 번째.

말이 안 통할 때는 표정과 행동을 따라하면 된다.

잔스카르에서 시골 동네에 이틀 지냈다. 조금 심심하기도 했고 마을 사람들이 결혼식 준비로 무척 바빴기 때문에 뭔가 돕고 싶었다. 바깥에 건축 자재를 쌓아놓은 위험한 곳에서 뛰어노는 어린 아이들이 보여서 놀아주기로 했다.

미취학 아동들이라 영어를 배우기 전이어서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만히 살피고 있다가 아이들이 뭔가 재밌어서 웃거나 뭔가를 너무 원하거나 짜증 내거나 우는 등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에 주목했다. 그때 눈을 바라보며 표정과 행동을 따라했다.

아이들의 감정을 신호로 삼아 일단 그 신호를 이해했다는 걸 바디 랭귀지로 보여준다. 그 다음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고자 노력했다. 이렇게 하면 말이 한 마디도 안 통해도 금방 거리를 좁히고 신뢰를 얻을 수가 있는 것 같다. 너무 당연한 말이네.


잔스카르 귀염둥이들




세 번째.

일을 할 때는 계획을 하더라도 놀 때는 계획을 덜 하는 편이 확실히 낫다.

일을 할 때는 시간이 한정돼 있고 순간순간이 돈으로 바로 환산이 되며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요구부터 우선 만족시켜야 되기 때문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서 계획이 좀 필요하다. 그게 재미가 없어서 그간 조직에서 일하는 게 너무 따분했는지도 모르겠다. 딱 계획한 그만큼만 하기 때문이다. 근데 놀 때는 기존의 계획을 아득히 벗어난 상황을 많이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훨씬 재밌다.  

난 여행에서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거나 뭘 배우거나 하여튼 뭘 뽑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놀려고 왔다. 직장인 휴가일 때보다 시간도 많다. 그래서 상세 계획을 많이 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대처했고 그 편이 훨씬 결과가 나았다. 이건 인프라가 미비해서 시간 예측이 어렵고 서비스가 좀 엉성해서 예약을 하고 얽매일수록 나중에 일이 더 복잡해지는 네팔이나 인도 상황에 특히 잘 맞았다.

최소한의 필수적인 것만 미리 계획한다. 예컨대 여행하면서 불법체류자는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비자 만료를 앞두고 국경 이동을 앞뒀다면 새로운 나라의 비자를 미리 신청해 둔다. 국경 도시에 시간 맞춰 도착하기 위한 교통편을 파악해 둔다. 혹시 비자가 안 나올 때는 정반대로 이동해야 하므로 이동 경로를 대략 생각해 둔다.

나머지 상세한 것은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면서 대처하며 옵션을 열어 두고 천천히 결정한다. 좋은 사람들을 우연히 알게 되면 얘기해 보았고 더 궁금한 게 생기면 그리로 한 걸음 정도만 더 가보았다. 그럴 때 계획이나 상상을 할 수 없었던 더 우월하고 다양한 옵션이 열렸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난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 미리 정해놓은 이상이나 목적이나 스토리 내에 스스로를 한정하고 싶지 않다. 되어가는 대로 살다 보면 스토리야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신경쓸 필요가 없고, 다만 하루하루 방종하지 않기 위한 계획과 훈련과 노력은 필요. 난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 태어나지 않았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목적.


파키스탄 가려면 레 - 카길 - 스리나가르 - 암리차르 이동편 파악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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