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손글씨와 종이책과 줄글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본문
디지털 매체의 한계 – 공간 정보의 부재
2024년 카트만두의 더르바르 광장에서 나는 12년 전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감정이 어땠는지에 대한 것은 스토리이기 때문에 기억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내가 앉았던 물리적인 위치까지 정확히 떠올랐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경험이었다. 이는 인간의 기억 능력에 있어 공간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 주는 경험이었으며, 나는 그 중요성에 대해서 이미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여행에서든 회의에서든 손글씨 메모장을 자주 지참하는 편이다. 직접 손으로 메모를 하면 빠르고 편리할 뿐 아니라, 노트라는 공간 안에서 내용을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다. 실제 노트는 디지털 노트와는 달리 평면에 그치지 않고 두께라는 3차원 요소를 갖췄다. 특정 내용을 적은 공간적인 위치를 맥락 정보로 활용해서 해당 내용을 다시 찾아내는 것이 수월하며, 이는 마치 직접 만든 길을 다시 찾아가는 것과 같다. 내용의 조직 자체를 내 손으로 했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전공해서 원서를 읽어야 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도 공간적 기억을 매우 요긴하게 활용했다. 모르는 단어를 일단 넘어갔다가 나중에 다시 찾을 때가 있다. 그러면 그 단어가 책의 몇 쪽쯤, 어느 평면 좌표쯤에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그 위치로 돌아가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이는 언어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책의 두께와 페이지 구성과 같은 다양한 물리적인 단서들이 매우 유용한 기억의 재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반면, 전자책은 이러한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다. 휴대성이나 저장성은 좋으나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특성은 최소화되어 있다. 전자책에서는 어떤 부분에 표시를 해두지 않는 이상 페이지를 넘어가면 끝이다. 즉 공간적 브라우징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정보 밀도가 높은 학술서나 역사책은 가급적 종이책으로 읽고, 내용을 죽 넘겨가며 읽을 수 있는 비교적 흥미 위주의 책은 전자책으로도 본다. 이는 공간적 기억과 감각적 경험을 정보 처리에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본능적인 전략이다.
노트북 타자 필기도 비슷한 한계를 가진다. 타자 필기는 들은 내용을 가급적 그대로 속기하여 보관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직접 노트 필기를 할 때에 비해 내용을 논리 구조에 맞게 공간적으로 재배치하는 데는 제약이 있다. 즉 타자 필기만 해둔 내용을 정말로 이해하려면 정보를 직접 재조직하는 추가 노력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태블릿 필기는 타자 필기보다는 낫지만, 노트 필기가 제공하는 물리적 질감이나 공간적 정보를 주지는 못한다.
디지털 기술은 정보의 저장과 복제를 용이하게 만들었지만, 정보의 조직과 맥락적 이해라는 측면에서 기존의 물리적 매체가 갖는 강점은 충분히 갖지 못한다. 디지털 도구의 확산은 사람들이 점점 공간적 기억과 같은 다양한 인지 능력을 덜 활용하게 만든다. 이처럼 디지털 매체는 공간적 단서를 제공하지 못해 개인의 정보 기억에 어려움을 줄 뿐만 아니라, 교육 및 업무 환경에서도 효율적인 정보 전달에 한계를 드러낸다.
파워포인트의 한계 – 정보 전달의 비효율성
나는 파워포인트로 업무 문서 작성하는 것을 매우 비선호한다. 파워포인트는 슬라이드를 선형적으로 배열하도록 강제하여, 여러 대안을 동일 선상에 놓고 동시에 비교하거나 비선형적인 아이디어를 전개할 때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전자책처럼 공간적 단서가 부족해 한 번 넘긴 내용을 다시 찾거나 전체 맥락을 파악하기도 어렵다. 또한 한 슬라이드당 정보를 제한적으로 담아야 하므로 전체 슬라이드 수가 많아져, 정보의 양과 심도에 비해 작업 공수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 파워포인트는 교육과 업무 현장에서 널리 사용되지만, 본질적으로는 퍼포먼스를 보조하는 시청각 매체이므로 깊이 있는 정보와 논리 구조 전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놀랐던 것은 교수들이 파워포인트 자료를 인쇄해 수업의 주자료로 활용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는 발표 보조 수단일 뿐 학습용 기본 자료로는 부적합하다. 키워드와 불렛 포인트, 차트와 이미지의 나열로 이루어진 파워포인트 문서는 전체 내용의 논리적 연관성을 충분히 담지 못한다. 반면, 줄글 형식의 자료는 완결된 논리 구조를 제공하며, 독자가 내용을 스스로 재조직하고 이해하도록 돕는다. 학습 과정에서 정보의 능동적인 재조직은 필수적이며, 언어 능력과 공간적 사고가 함께 활용된다.
교육과 업무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분절된 정보를 연결하고 이를 해석하며 소통하는 데 있다. 그러나 파워포인트 문서는 이 과정에 충분히 기여하지 못한다. 과도한 파워포인트 의존은 사람들이 긴 책이나 영화를 기피하고, 짧고 단편적인 콘텐츠에 익숙해지는 현상과 맞닿아 있다. 이는 문해력과 사고력을 저하시킨다.
업무 현장에서 파워포인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업무의 본질을 왜곡한다. 작성자와 결재자가 파워포인트 작성을 업무의 완성으로 착각하며, 보고 내용의 깊이를 바탕으로 한 전달력보다는 형식적인 문서화와 결재 자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관료제의 한계로, 문서화되지 않으면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고자는 탄탄한 근거를 준비하고 효과적인 전달 방식을 고민하기보다, 불렛 포인트와 같은 정형화된 형식에 내용을 억지로 맞추고 문서를 보기 좋게 만드는 데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이는 내용의 본질보다 형식에 집중하는 문제로, 제품 및 서비스의 내실보다 마케팅에 치중하는 현상과도 유사하다.
교육 및 비즈니스 분야에서는 상당히 심도가 있는 정보를 능동적으로 조직하고 소통하는 역량이 핵심적이다. 디지털 도구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기존의 물리적 매체가 가진 강점을 유지하려면, 줄글과 같은 논리적이고 서사적인 텍스트를 주 자료로 활용하되, 시청각 디지털 자료를 보조적으로 활용하면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업무 보고에서는 줄글 기반의 보고서를 기본으로 하되, 실제로 발표 등이 필요한 경우에 파워포인트를 보조 자료 위주로 간략히 준비할 수 있다. 교육 현장에서도 수업에 앞서 사전 독서를 하도록 하고, 이에 대해 간단한 퀴즈 또는 작문을 과제로 부여하여 개념이나 현상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돕는 수업이 매우 효과적이다. 내가 가장 좋아했고 내용을 아직도 많이 기억하고 있는 전공 수업인 한국어음운론이 이렇게 진행됐다. 분야에 따라서는 의견을 정립하는 것이 중요한 분야가 있을 수 있어, 각자 텍스트로 학습한 후에 발표 및 토론 수업을 운영하면 학생들이 정보를 능동적으로 조직하고 사고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
특히 아동 및 청소년기에는 지력이 다방면에서 급속도로 발달하는데, 이때 필수 교육 과정에서 문해력과 사고력의 기초를 쌓아야 한다. 이 시기에 전자책과 태블릿을 전면 도입하거나 주 교육 자료를 파워포인트 등 개조식 시청각 자료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성급하다. 디지털 기기와 물리적 기록 매체, 시청각 자료와 줄글은 서로 대체 관계가 아니라 기능이 서로 다른 보완 관계에 있으므로, 각자의 강점을 살리면서 적절히 균형 있게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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