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결과는 야권의 약진입니다. 70석 중 30석을 얻어 부결권을 지켜냈습니다. 여권은 친중파, 야권은 범민주파와 자결파(본토파, 독립파 포괄)를 통칭합니다.기성 부유층이 주로 여권을 지지하고 그 대안세력이 야권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습니다.이 자결파라는 용어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홍콩 현지의 빈과일보(애플데일리)의 선거 결과 페이지에서는 자결파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 국내 언론에서는 주로 독립파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독립파라고 싸잡아 말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자결파 6석 내부에서도 성향이 다양합니다.
이번에 홍콩 친구 말을 들어보니, 2015년 초에는 자결파라 불릴 만한 세력이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답니다. 1년 반 동안 외국 가서 공부하고 오자마자 이번 선거판을 봤더니 구호가 조금씩 다른 세 가지로 늘어나 있어서 흥미로웠다고 하더군요. 조그만 홍콩이지만 정견은 생각보다 다양하다면서 자기가 봐도 재미있대요. 여하간 이 자결파 안에는 본토파와 독립파가 같이 묶이곤 합니다. 자결파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입장을 포괄합니다.
1. 독립은 비현실적이지만 일국양제를 채택하면서 약속한 항인치항(港人治港, 홍콩 시민이 홍콩을 다스린다) 원칙만은 지켜라 (자결, self-determination)
2. 홍콩은 내륙 중국과 구별되는 또 다른 본토로서의 홍콩이며, 본토 문화를 지켜내야 한다 (본토, localism)
3. 홍콩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키자 (독립, pro-independence)
▲ 다양한 진영의 선거 홍보물. 사실 저번 주말에 업데이트를 안하는 동안 잠시 홍콩에 갔다 왔습니다(!!) 선거가 끝난 관계로 길거리에 남아있는 홍보물이 많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찍은 것 중에는 위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 스펙트럼이 나름 골고루 반영돼 있습니다. 슬로건을 구경해 보세요.
1,3번은 의미가 자명할 것이니 2번에 대해서만 부연하자면 홍콩에는 지금 본토라는 단어가 꽤 유행입니다. 홍콩 시민들이 갖고 있는 오래된 집단 기억을 환기시켜서 '홍콩다움'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대답하려는 움직임입니다. 오래된 사진 특히 지금은 철거하고 없는 구룡성채 사진의 유행, 철거 위기에 놓인 오래된 기념물이나 명소를 지켜내려는 움직임 같은 것이 본토주의의 일환입니다. 올해 구정 때는 몽콕의 길거리 어묵 포장마차를 없애겠다는 정부 조치에 반발한 소위 어묵혁명이 일어나기도 했죠. 무슨 어묵을 가지고 혁명이냐며 웃지 못할 해프닝이라고 조소하는 사람도 있지만, 소소한 일상생활 문화나마 홍콩의 중요한 일부이기에 행정 권력이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가만 둘 수 없다는 것이죠.
▲ 어묵혁명
야권의 득표 결과를 선거 부문별로 보면 지역구 35석 중 19석을, 간선 직능대표 30석 중 8석을, 직선 직능대표 5석 중 3석을 얻었습니다. 2012년도의 27석보다도 3석을 더 늘렸습니다. 정치 성향별로 보면 30석 중에 범민주파는 23석, 자결파는 6석, 그 중도 성향은 1석입니다.직능대표제와 간선제라는 제도가 결합돼서 30석씩이나 차지하며 친중파의 텃밭 역할을 하는데다 일부 야권 후보가 신변의 위협까지 받은 마당에 꽤 선전했습니다. 게다가 자결파는 겨우 6석뿐인가 싶지만, 2012년 의회에서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는 점을 특기할 만합니다. 2014년의 우산혁명 이후에 정치 지형 위로 떠올라서 다음 의회의 거의 1/10을 차지해 버린 신진 세력입니다.
2014년 중국 정부는 유례 없는 백서를 발간했습니다. 행정장관을 직접 보통 선거로 뽑게 해달라는 홍콩 시민의 요구에 대해서, 직선제를 허용하는 대신 정부 입맛에 맞는 후보자 3명을 정해주겠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무슨 미인대회도 아니고 대체 이게 어떻게 직선제냐며 반발한 홍콩 시민들은Occupy Central이라는 시민불복종 단체의 주도로 주민투표도 실시했지만, 중국 정부는 이 투표가 불법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에 주로 대학생을 중심으로 홍콩의 중심업무지구인 센트럴을 점령하여 행정장관 직선제를 비롯한 민주주의의 확대를 외치는 Occupy Central 운동이 벌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물대포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우산을 사용하면서 우산혁명이라는 별칭이 생겨납니다. 이 우산혁명을 직접 이끈 대학생 지도자들이 기존 범민주파보다 더 급진적인 홍콩 자치/본토/독립 기조를 내걸고 정당을 결성해서 이번 의회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 홍콩 행정장관 선거는 미인 대회??
▲ Occupy Central (우산혁명)
4. 주목할 만한 야권 당선자
자결파는 맨땅에서 시작해서 총 6석을 얻었습니다. 그 중에 우리 언론에서도 많이 다룬 데모시스토 정당의 네이선 로(Nathan Law, 羅冠聰)는 올해 무려 23살로 홍콩섬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이번에 최연소 의원 기록을 세웠습니다. 네이선이랑 같이 일하는 친구가 바로 우산혁명 덕분에 우리한테도 익숙한 조슈아 웡(Joshua Wong, 黃之鋒)입니다. 머리가 밤톨같이 생기고 비쩍 마른, 딱 봐도 어린 조슈아는 심지어 1996년생입니다... 하지만 2012년 중국 정부가 홍콩 학교에서 국민교육을 강화하려고 하자 중학생 단체(!)인 학민사조를 결성해서 무산시켜 버리는 저력을 보여주었죠. 이런 배경을 갖고 있는 데모시스토는 주민 투표를 통해서 향후 홍콩의 진로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국내 언론에서 흔히 독립파로 분류하긴 하지만, 데모시스토의 강령을 찾아보면 독립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독립은 비현실적이라고 보지만 고도 자치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카우룬 서 지역구에서 당선되었으며 네이선과 협력하기로 한 라우시우라이(Lau Siu-Lai, 劉小麗)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 데모시스토. 가장 왼쪽이 조슈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네이선.
이번 당선자 중에는 성소수자도 있습니다. 인민역량(People Power, 人民力量)이라는 범민주파 급진 정당을 이끌고 있는 레이먼드 찬(Raymond Chan, 陳志全)이 그 장본인입니다. 라디오 방송인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 그는 이번에 신계 동 선거구의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됐고, 저번 회기에 이어 재선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중국과 홍콩을 통틀어 최초로 커밍아웃한 정치인이 재선까지 달성해 냈으니 홍콩 정치판의 놀라운 포텐셜을 알 만하죠.
▲ 레이먼드 찬
에디 추(Eddie Chu, 朱凱廸)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 분은 이번에 총 9명을 뽑는 신계 서(New Territories West) 지역구에서 최다 득표인 거의 8만 4천 표 이상을 얻어 당선되었습니다. 지역구 선거는 많은 후보가 출마하면 해당 지역구 유권자들이 한 명에게 투표해서 득표수 순서대로 선발하는 방식입니다. 에디 추는 이 지역구에서뿐만 아니라 이번에 선거에 나온 모든 후보 중에서도 가장 많은 표를 얻어서 표왕(票王)이라고 불립니다. 무소속으로 나왔는데도 그랬습니다. 본인과 가족들에 대한 신변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의 롤모델은 최근 중국 당국에 몇 개월간 납치되었다가 풀려난 후 자신의 불법 납치 감금 사실을 널리 알린 코즈웨이베이 서점 주인 람윙키라고 합니다. 같은 지역구에서 후보로 나왔지만 중국 정부 쪽 사람들에게 협박을 받았다며 사퇴한 켄 초우(Ken Chow, 周永勤)와 많이 비교가 되고 있죠. 에디 추는 지금 경찰들로부터 신변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렁춘잉 행정장관이 지난 토요일에 위로차 따로 전화 통화를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 중국의 불법 납치 감금 이후 풀려나 정황을 증언한 금서전문 서점 주인 람윙키
▲ 에디 추의 홈메이드 정치선전물. 란타우 섬의 무분별한 개발을 반대하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 켄 초우, 에디 추
선거 최다 득표자니까 배경을 들여다봤더니 더 흥미롭습니다. 독립 언론인 출신으로 이란 테헤란 대학에서 페르시아어를 공부한 후 이란 문화권의 여러 국가에 머물며 기사를 썼습니다. 최근에는 환경 보호와 동물 권리 보호, 토지 정의, 젠트리피케이션 반대, 생태주의 공동체 건설 등등 여러 가지 상당히 급진적인 이슈를 위해 시민 운동을 해왔습니다.2006년도에는 토지 매립을 위해 침사추이-센트럴을 잇는 스타 페리의 부두를 폐쇄하려 했을 때 반대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이 운동은 토지 매립에 반대하는 환경 운동가뿐 아니라 홍콩만의 집단 기억을 보존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불러일으켜, 홍콩 본토주의의 계보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차지합니다. 이외에도 강제이주민을 발생시키면서까지 강행하는 홍콩-선전-광저우 고속철 건설에도 반대 목소리를 냈습니다. 토지정의연맹(Land Justice League)이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 중이기도 합니다.
▲ "페리 부두 철거는 옳지 않다!"
토지 정의 하면 (2)편의 향의국과 필연적으로 얽힐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바로 그렇습니다. 에디 추는 신계 지역의 토지 개발과 주택 문제에 대해서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정부에서 원래 신계 Yuen Long 지역의 Wang Chau에 17,000호의 공공주택을 더 지으려고 2012년에 사업을 시작했다가 4,000호 수준으로 멈추고 말았는데, 평소 향의국 어르신들은 정부가 제시한 땅값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 공공주택 건설 계획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에디 추는 향의국 소속의 땅 주인들이 로비를 해서 규모가 축소된 게 아니냐는 입장입니다. 향의국은 에디 추가 눈엣가시겠죠. 자기네 기반 지역이 바로 신계 서쪽인데 그 지역구에서 출마해서 1등으로 당선된 것도 모자라서 자기네 토지 권리나 내부 의사결정 과정에 대해서까지 따지고 드니까요. 에디 추의 신변을 위협한 세력이 향의국과 결탁한 신계 지역 삼합회(무간도 같은 홍콩 느와르 영화에 항상 나오는 폭력 조직)라는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저번 편에 소개해 드린 현 향의국 의장이자 이번 선거 당선자인 케네스 라우(Kenneth Lau)는 연관성을 부인했습니다. 에디 추는 최근 행정장관과의 전화 통화에서도 향의국과 정부, 그리고 신계 지역의 삼합회의 유착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향의국 운영 과정을 투명화하는 방향의 법안을 지지할 것인지 질문했지만 명확한 답변을 듣지는 못했다고 하네요. 그는 차기 의회에서도 신계 지역의 토지 문제를 계속 파고들 각오입니다.
▲ 야권의 주요 인물들 집합. 가장 중간의 안경 쓴 사람이 에디 추. 그 옆의 단발머리가 라우시우라이, 그 뒤의 서양인은 네덜란드 출신으로 홍콩 시민권을 얻어서 이번 선거에도 출마한 적이 있는(사퇴함) 폴 짐머만(Paul Zimmerman), 에디 추의 오른쪽 옆 장발 남자는 Leung Kwok Hung(梁國雄)이라고 하며 Longhair라는 별명으로 알려져있고 사회민주연선 소속 범민주파 정치인이자 역시 이번 선거 당선자, 그 옆은 네이선과 조슈아.
5. 나가며
새 입법회는 오는 10월에 개회합니다. 내년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행정장관 선거가 예정돼 있습니다. 범민주파와 자결파가 어떻게 연합해서 친중파를 견제해 나갈지, 그리고 행정장관 선거 판도에는 어떤 영향이 있을지 무척 궁금합니다. 이번에 역대 최대의 투표율(약 58%)을 보여주었다는 홍콩. 역사적으로 수많은 쿨리와 화교를 배출한 항구이자 중국 내륙에서 들어온 난민들의 임시 피난처, 나아가 영어권 국가로 재이민 가기 위한 발판이었던 홍콩. 전세계 금융맨의 커리어 징검다리이자 관광객과 불법 노동자들이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불야성의 도시. 공항이나 항구처럼 언제나 스쳐가는 곳으로만 여겨졌던 홍콩. 그런 홍콩이 명백한 제도적 한계와 대내외적인 위협 속에서도 당당한 로컬을 갖고 다채로운 정견을 포괄하는 정치 공동체로 각성해가는 이야기를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