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도를 닦는 마음으로.... 본문
현재 다람살라 맥로드 간즈이며 모처럼 시간이 나서 태블릿을 들고 카페에 와있음. 오늘은 인도 여행 절망편.
지금 C Form 발급을 기다리고 있다. 내일부터 이틀간 달라이 라마 설법이 있는데 참가하려면 숙소에서 만들어주는 C Form이란 문서를 내야 한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우리 숙소에서 만들 줄을 모른다. 그냥 한 장짜리 서류를 양식만 채워서 주면 되는데 일요일이라서 못 만든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지 아예 모르겠고 영어도 잘 안 통해서 두손 두발 다 들었다. 11시까지 만들어 준다길래 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시간만 낭비했다. 내가 어제 새벽 3시 돼서 자고도 이거 신청하러 가려고 6시에 일어났는데 그냥 기다리다가 아침이 다 갔다. 안 되는 이유가 주말이어서인 거면 아예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할 것이지 왜 다른 사람 시간을 이렇게까지 낭비시키냐고 화를 버럭 내고 일단 나왔다.
인도 여행을 하다 보면 답답하고 화가 나는 일이 정말 자주 있다. 바깥의 일에 마음이 흔들리고 싶지 않은데 쉽지 않다.
며칠 전에 구르가온에선 숙소를 예약하고 확약을 위해 선불금도 냈다. 그것에 대해서 미리 확인 메시지까지 주고받았는데 막상 갔더니 밤 10시 15분에 방이 없다며 체크인을 거부당했다. 자기네는 본사랑 프랜차이즈 계약을 끊은 상태라 환불을 직접 해줄 수 없다며 본사 서비스센터에 연락하라고 하더라. 나는 바로 이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미리 예약하고 성실하게 선금까지 냈을 뿐 전혀 잘못한 것이 없다. 밤 10시가 넘어서 문전박대를 당하면서 환불까지 직접 알아서 받아야 되는데 죄송하다는 말 한 마디 못 듣는 게 말이 되냐고 당신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화를 버럭 내고 나왔다.
이런 것쯤은 정말 자주 있는 일이다. 최근 내가 다닌 동네는 전부 성수기여서 숙소를 예매하고 찾아갔는데 약 60-70%의 확률로 예약을 인지조차 못했다. 그냥 현장박치기가 제일 확실하다. 다만 버스를 12시간씩 타고 와서 짐을 들고 다니며 뚜벅이로 걸어다니며 성수기철에 빈 방을 찾는 게 쉽지가 않을 뿐이다.
인도의 일처리 속도나 효율성은 내 기준을 전혀 따라오지 못한다. 나는 워낙 한국의 서비스 스탠다드에 익숙해져 있다. 또 한국인 중에서도 성질이 급하고 성실성이 매우 높은 편(=성실성이 아주 높다는 것은 곧 괴팍하다는 의미)이다. 인도에서 무능함 또는 관료주의 때문에 붕 떠버린 시간을 기약 없이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정말 쉽지가 않다.
C Form은 그나마 여기 사는 친구한테 물어보았다가 자기가 오늘 만들어줄 수 있다길래 부탁을 하게 되었다. 친구는 5년 전에 왔을 때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주인이자 당시 트리운드 트레킹의 가이드를 해준 사람이다. 달라이 라마 설법 참가 신청은 오늘 오후 2시부터 5시까지가 마지막 기회고 지금 여기 1시가 넘어 2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아마 줄이 꽤 길 것이다. 언제 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선의로 내 일을 대신 해주는 친구를 재촉할 수는 없어서 뭐 어쨌든 나는 카페에서 밥을 먹고 잡글을 쓰면서 기다리고 있다.
인도 여행은 정말 매일매일 쉽지가 않다. 원하는 만큼 씻지 못하고 꼬질꼬질하게 다녀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제 약간 내려놓았다. 하지만 시간 운용에 대해서만큼은 어느 정도 좀 상식선에서 예측이 가능했으면 한다. 나도 계획을 막 분 단위로 숨막히게 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설법 참가 신청처럼 중요한 것만 좀 일찍 여유있게 해놓고 나서 나머지 시간은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보내고 싶다. 그러나 구비 서류가 언제 될지, 막상 신청하러 가면 새치기가 얼마나 심할지, 등록 자체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 하루는 설법 신청하는 것으로 시간이 다 가게 생겼다. 정말 온라인으로 하면 버튼 몇 번 클릭으로 마무리될 간단한 것으로 소중한 하루가 다 간다.
인간 문명의 요체는 예측가능성이다. 자연재해나 질병이나 죽음처럼 속수무책으로 인간을 위협하던 것들을 조금이나마 예측 가능하게 만들어 길들이려는 끈질긴 노력이 곧 문명의 역사다. 난 한국 서울 정도면 상당히 최첨단 문명의 산물이라고 본다. KTX는 물론이고 버스마저 2분 후 도착한다고 하면 2분 후에 칼같이 오지 않는가. 그렇게 사소한 것들마저 매우 마이크로하게 예측 가능한 곳에서 촘촘하게 계획된 일정을 살던 사람이 인도에 오니 오늘 비행기가 뜨긴 할지, 셰어택시를 확보할 수 있을지, 예약해 놓은 숙소에 오늘 체크인은 할 수 있을지, 요청한 문서를 제때 받을 수 있을지가 전부 예측이 안되어 참 당황스럽다. 그래서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계획이나 예약을 거의 하지 않고 그냥 대응한다.
좋게 생각하면 바로 이 예측불가능성이 내 급하고 성마른 성질을 다스려준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다 방법이 있고 해결이 가능하단 걸 경험으로 배우게 된다. 그러나 안 좋게 생각하면 매일매일 답답한 일들이 끊이지 않으며 매번 화가 솟는 곳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인도 사람들은 화내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기에 이들은 정말 인자강이라는 생각만 든다. 전혀 흥분하지 않고 집요하게 자기 주장을 하여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사람들. 엉망인 인프라 때문에 애초에 안 될 만한 것도 자기 개인 기지로 결국 되게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 인도는 아직 엉망인 데가 많은 나라이지만 이 환경에 적응해서 사는 인도인들의 정신건강 역량만은 절대 무시해선 안된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세계 인구의 20%를 차지하며 미친 듯이 교육열과 창업 의지를 불태우고 있기에 이 나라는 정말 꽤 무서운 나라로 성장할 것이며 사실 이미 그렇다.
한국은 모든 계 예측 가능해지도록 열심히 노력하여 문명을 발전시킨 결과 일상 생활 편의성이나 행정 서비스나 인터넷 속도가 전세계 최상급이다. 그 대가로 사람들이 성질 급하기로 유명하며 융통성 없고 화가 많으며 인도 여행 같은 것을 도저히 참기가 어려운 사람이 많다. 반면 인도는 예측이 쉽지 않은 자연 상태에 대략 적응을 했기에 문명이 아직 좀 덜 발달했다. 그 대신 사람들이 차분하고 느긋하며 화가 거의 없고, 당장 자기 생존에 직결된 일은 어떻게든 자기 역량을 발휘해서 기발하게 해결해 버린다. 이런 걸 바로 주가드(jugaad) 정신이라고 배웠지요. 뭐가 좋은 걸까요 대체? 내가 화가 많은 걸까요 이 나라가 비정상인가요. 생각 좀 나눠 주십시오. 하루 즐거우면 다음 날은 열받고 그 다음날 또 거짓말처럼 까먹게 만드는 이 나라에서 오늘은 왠지 도를 닦는 심정입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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