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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남아시아

인도 아루나찰 프라데시 타왕에서 감기 걸려 누운 중 잡념

bravebird 2024. 5. 5. 18:32

타왕 온 것이 4일째 됐다. 어제 저녁부터 감기가 들려는지 목이 따가워서 오늘은 일부러 그냥 누워만 있다.

여기도 2800m 정도 되는 고지대고 말을 많이 하거나 많이 걸으면 은근히 숨이 찬다. 어제 카페에서 만나서 같이 다녔던 현지 친구는 뉴델리에서 간만에 고향에 돌아온 건데 고산병이 났다.

이곳 날씨는 꽤 변덕인데 비가 내리고 흐려져서 을씨년스러워질 때면 샤워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침대에 전기장판이 있어 좋다. 지금 이 지역 전체가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자주 끊기긴 한다. 밖에 카페나 식당을 다녀봐도 와이파이가 거의 없다. 온수도 콸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수 탱크(geyser)에 데워진 일정량만큼만 사용할 수 있는데 양이 적어서 샤워 중 무조건 온수가 끊기므로 샤워도 아마 한 번밖엔가 못했다. 머리도 오늘 간만에 감았다. 빨래방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 작은 마을이라 옷도 맨날 같은 걸 입는다. 그런 걸 생각하면 빨리 샤워펑펑 전기펑펑 가능한 아랫동네로 돌아가고 싶지만 정작 콜카타에서는 덥다고 항마력 딸린다고 불평했던 걸 제발 좀 기억하길 바란다 ㅋㅋㅋㅋ 한편, 일반적으로 평생 한번 와보기도 힘든 아루나찰 사람들의 환대가 너무 고맙고 특별해서 1개월짜리 퍼밋이 허용하는 만큼 꽉 채워 지내고 싶기도 하다. 지내 보면서 천천히 생각하려고.


내가 누운 방



봄딜라에서 지냈던 게스트하우스의 큰딸이 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다. 이곳엔 방긋방긋 참 잘 웃는 5개월짜리 남자 아기가 있다.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닌 아기인지라 보기만 하면 돼서 너무 사랑스럽다. ㅋㅋㅋㅋㅋ 아침을 부엌에서 같이 먹는데 혹시 감기를 옮길까봐 오늘은 방으로 좀 가져다 달라고 했다. 입맛이 떨어져 버려 다 먹지 못한 그릇이 아직도 방에 있어서 반납하려면 곧 침대를 떨치고 나가기는 해야 할 것이다. 나가면서 며칠 전 같이 놀았던 친구의 베이커리에 가봐야겠다. 원래 타왕 사원에 오늘 가서 한참 있으려고 했는데 그건 모레쯤으로 미뤄야겠다. 내일은 결혼식에 초대를 받아서 한번 가볼 것이다.

지금 이 동네에 외국인은 우리 일행을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는다. 아루나찰 퍼밋은 혼자 받을 수 없어서 인터넷에서 찾은 한국인 한 분과 그 분이 시킴에서 만난 네덜란드인 한 명이 우리 일행이다. 타왕에 들어와서 만났다.

하루는 카페에 밥 먹으러 갔더니 현지 또래들이 말을 많이 걸어 줬다. 그날 밤 그 친구들이 동네 친구에 사촌에 온통 불러모아서 대접해 주었다. 재미나게 술 마시고 자정까지 한바탕 놀았다. 그 다음날에도 같은 카페에 찾아갔더니 그 친구들의 또다른 사촌들이 사랑방 마실 나오듯이 와 있다가 우리를 차를 태워 가지고 새로운 곳에 데려가 구경시켜 주는 그런 날들이다.


아름다운 우겔링 사원
어느 비구니 사원의 정경



6대 달라이 라마가 태어난 곳에 지어진 사원(우겔링 사원)에 갔더니 17살짜리 동네 소년이 설명을 다 해주고 집에 초대해 주고, 그 자리에 계시던 어머님과 친척들까지 다 같이 놀아주고, 그 다음날 야크 고기를 대접해 주겠다고 저녁 식사에까지 초대해 주고, 월요일에 하는 사촌 결혼식에도 놀러 오라고 하는 그런 동네다. 동네 사람들이 거의 사촌이거나 인척 아니면 친구이고 손님을 마치 가족처럼 맞아 준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쓸쓸하고 막막하다. 추운 곳에 아파 누워 있자니 또 간만에 잡생각이 가득 차오른다.

한국에서는 하고 싶은 일이 도무지 안 떠오르네?
그럼 외국에서 뭔가 자기만의 일을 할 수 있겠어?
그렇게 소원이던 곳에 여행 와서 놀기만 하는 것도 하루하루 간단치 않은데?
집(즉 안락함)은 지키고 싶잖아? 근데 자기 일 개척하는 거랑 양립이 가능하겠어? 둘 중 한 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겠어?
대체 난 잘하는 게 뭐지? 근데 욕심은 많네?
하고 싶은 거라도 있긴 있어?
쓸쓸하고 막막할 때 대체 누구한테 얘기해야 되지?
시간은 가고 돈은 줄어드네?

가끔 여행 중 위와 같은 잡념이 많이 들 때가 있는데 항상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제자리를 지키려고 한다.

지금 평생 소원대로 놀고 있잖아.
놀라고 회사에서 돈까지 쥐어 주면서 내보내 줬잖아.
난생 처음으로 시간과 돈과 체력이 모두 다 있잖아.
여행은 리턴도 100프로 확실하잖아. 심지어 그렇게 오고 싶던 곳들만 다니고 있잖아. 그런데도 가만히 못 놀고 잡념에 흔들릴 거면 앞으로 더 큰 돈과 시간과 정력이 들어가는 일들은 도무지 할 수가 없다! 확정이익이 100프로가 넘는 것도 가만히 못 기다린다고? 그러면서 무슨 투자를 하고 자기 일을 개척해?
그러지 말고 마음을 굳게 먹고 일단 놀아라.
불확실함 속에 가만히 머무를 줄 알아라.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추워서 못 씻고 빨래 못하고 감기 걸리고 밥벌이 고민했던 것들은 다 잊히고 좋은 기억만 남아서 사무치게 그립기만 할 하루 하루다.

자 이쯤하면 됐고 이제 친구네 베이커리로 나가서 매출 올려 주자. 오늘은 뭘 구경하러 갈 생각하지 말고 게으르게 쉬어야겠다. 타왕에서 유난히 알차게 논 것들은 와이파이가 없어 기록이 밀렸는데 나중에 하든지 말든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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