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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요새
내가 페미니즘에 매우 실망하고 거리를 두게 되면서 집에 여성주의 관련 책이 별로 안 남아있는데 잘 읽은 몇 권은 남겨두었다. 그 중 '오빠는 필요없다'라는 책이 있는데 2011년에 중국 가기 전에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난다.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여자들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이다. 나는 진보든 보수든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자기 객관화가 안 되고 성찰을 할 줄 몰라서 자기 입장만 우기는 꼴통 꼰대가 싫다. 처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남자 꼰대가 싫어서였고 최근 페미니즘에 환멸을 느낀 것은 페미니스트 꼰대가 싫어서인데, 이 책은 다양한 꼰대 중에서도 운동권 꼰대를 까는 책이다. 진보 진영의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행태에 환멸을 느껴본 사람들이라면 페미니즘을 평소 싫어했더라도 의외로 ..
용산사는 타이페이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도교의 신전은 흥미롭다.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월하노인 같은 가상의 존재, 그리고 화타나 관우 같은 실존 인물 등 온갖 것을 섬긴다. 주로 건강, 시험운, 재운, 뱃사람들의 고장이니까 해상 안전, 배우자 복이나 자식복 같은 걸 빈다. 기복적이고 아주 인간적인 내용이다. 용산사에 가면 이런 별의별 기도를 올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다. 나는 얼마 전에 타이페이 여행을 가서 주변 사람들 기도는 잔뜩 했지만 정작 내 기도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내가 선량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뭘 기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천진난만한 사람들이 부럽다. 그런 사람들은 자연스럽고 자발적이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
표트르 코즐로프는 러시아의 실크로드 탐험가 중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와 함께 제일 유명하다. 프르제발스키가 발탁한 제자이자 동행이었다. 심지어 둘은 비밀 연인(!)이었을 거라는 설이 프르제발스키 전기에 등장할 만큼 각별한 관계였다. 프르제발스키는 평소에 자기 부하가 결혼을 하면 실연당한 것처럼 질투하고 슬퍼하며 결혼을 매우 막았다고 한다. 덕분에 동성애자였다는 추측을 많이 받는다. 여하튼 코즐로프는 프르제발스키 사후에도 독자적인 탐험 활동을 계속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특히 고비 사막의 버려진 도시 카라 호토(흑수성)를 발굴해 내어 서하 왕조(1038–1227)의 전모를 밝히는 데 기여했다. 카라 호토는 서하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서하는 티베트·강족 계통의 탕구트인이 북중국 고비 사막에 세운 국가다..
1888년에 프르제발스키의 5차 탐험대는 카라콜 이식 쿨 근처에서 출발 준비를 마쳤으나 프르제발스키가 갑자기 사망했다. 탐험대는 이듬해 봄에 출발했다. 지리학회는 새로운 탐험대장으로 미하일 페브초브를 선임했다. 미하일 페브초프 준가르 사막에서페브초프를 탐험대장으로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두 차례의 중앙아시아 탐험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프르제발스키처럼 그 역시 군인이었으며 합동군사참모대학을 졸업했고 어렸을 때부터 탐험을 꿈꿨다. 기분 좋은 행운이 젊은 대장을 도왔다. 1876년에 그는 자이산에서 중국 신장 치타이 현으로 가는 카라반을 지키는 카자크 100명을 이끌어줄 것을 제안받았다. 그 길은 준가르 사막의 스텝 지역에 있었는데, 페브초프는 정확한 좌표가 표시된 이 지역 상세 지도를 최초 제..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의 탐사 범위는 거대한 중앙아시아 전체를 포함하진 못했다. 몽골, 중국 서부 및 티베트 영토에는 유럽인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영역이 많이 남아 있었다. 프르제발스키와 동시대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다른 유명 탐험가들이 이 범접하기 어려운 지역을 조사했다. 중앙아시아 탐험프르제발스키가 두 번째 탐사를 시작한 1876년에 지리학회는 또다른 중앙아시아 탐험대를 꾸렸다. 북서부 몽골 조사가 그 목적이었다. 세 탐험가가 자이산에서 출발하여 몽골 알타이 산맥을 넘고 콥도에 도착했다. 탐험 대장은 전직 장교인 그리고리 포타닌이었다. 그는 갓 30세에 징역과 추방 등 많은 일을 겪었다.그리고리 포타닌 포타닌의 운명그리고리 포타닌은 옴스크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서 복무했으며, 이후 페테르부르크 대..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는 거의 20년간 중앙아시아의 산, 스텝, 사막을 조사했다. 중앙아시아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프르제발스키 이전까지는 유럽인들 중 그 누구도 방문한 적이 없는 곳이다. (역자주: 사실 스웨덴 사람인 요한 구스타프 레나트가 1700년대 초반에 이미 준가르에 볼모로 잡혀서 로프 노르 인근에 간 적이 있다. 태그 누르면 이전글 확인 가능.) 네 번의 탐험 동안 프르제발스키는 말 위에서, 그리고 도보로 3만km 이상을 소화해 냈다. 세묘노프의 추천 프르제발스키는 군인이었다. 어렸을 때는 보병 연대에 복무했지만 탐험을 꿈꿨다. 1861년에 합동군사참모대학에 입학하여 첫 번째 지리학 저작인 《아무르 지방의 군사통계학적 개설》을 썼다. 이 저술 작업을 하면서 프르제발스키는 도서관에서 찾을 수..
지질학자 이반 무쉬케토프(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Мушкетов) 또한 중앙아시아 연구자 중 하나였다. 그의 탐험은 지질학적 발견뿐 아니라 여러 흥미롭고 중요한 결실을 가져다 주었다. 이반 무쉬케토프 은메달페테르부르크에서 산림 학원을 막 끝낸 22세의 무쉬케토프는 1872년에 첫 번째 탐험을 떠났다. 그는 우랄 지방에서 기존에 러시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광물 세 가지를 발견했다. 그는 곧 투르키스탄으로 떠났는데, 투르키스탄은 당시 중앙아시아 전체를 일컬었다. 무쉬케토프는 1875년에 서부 및 중부 톈산을 넘었으며, 이식 쿨 호수에 들렀고, 고산 지대에 위치한 송쿨 호수에 도달한 다음 산골짜기를 따라 내려왔다. 그는 고대 후잔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유연탄 산지를 조사하여 산업용으로 적합하다..
표트르 세묘노프-톈산스키에 의해 시작된 중앙아시아 연구는 다른 탐험가들이 계속해 나갔다. 니콜라이 세베르초프(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Се́верцов)와 알렉세이 페드첸코(Алексе́й Па́влович Фе́дченко)는 1870년대에 많은 업적을 세웠다. 목숨을 걸고니콜라이 세베르초프는 어렸을 때부터 동물학에 가장 관심을 가졌다. 모스크바 대학의 자연과학부에서 수학하던 당시, 논문 주제도 고향인 보로네쉬 지역의 동물군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젊은 학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57년에 톈산을 따라 여행하던 당시, 세베르초프는 아랄 해와 시르다리아 강 하류 지역을 연구하는 탐험대를 이끌었다. 이 지역은 코칸드 칸국에 속했다. 코칸드 칸국은 ..
8월 마지막주였던 이번 여름 휴가에 나는 아무 여행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러시아어 학원을 빠지지 않고 다녔는데, 대신 나름대로 휴가를 기념한다고 읽고 싶은 텍스트를 직접 가져가서 선생님이랑 같이 읽었다. 지금 학생이 나밖에 없고 선생님이랑 친해서 가능했다.201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돔 크니기에서 초등학생용 얇은 백과사전 시리즈인 《마하온(МАХАОН)》 몇 권을 사왔었다. 그 중 러시아 여행가들(Русские Путешественники)에서 중앙아시아 탐험 부분만 발췌해서 읽었다. 혼자는 영 안 읽혀서 3년째 방구석에 박혀 있다가 선생님이랑 같이 읽으니 금방이었음. 단어가 지형에 대한 게 많아서 좀 어렵긴 했다. 책 전체는 정말 알차고 특별한 것이 시베리아, 북극, 알래스카, 캄차트카 반도, 중앙아..
재기발랄하고 장난기 많은 사람들 엄청 부럽다. 나는 그다지 재기발랄하진 않다. 예의와 상식 지키는 편이다. 웬만하면 점잖다. 대신 스스럼없는 드립 같은 거 잘 못친다. 흑역사 공개 같은 셀프 망가지기 잘 못한다. 선이 있고 웬만하면 넘지 않으면서 조심조심 거리를 지키려는 것이다.낯을 가리거나 수줍어하는 쪽은 분명히 아닌데, 쉽게 가까워질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블로그에도 느껴지지 않을까? 힘빼고 쓴 신변잡기는 거의 살려두지 않는다.이곳에서는 그렇게 하기로 스스로 룰을 정해놓은 것이다. 블로그는 일상에서 숨죽여 지내는 내면의 샌님 오타쿠 진지충이 날뛸 때 배출구로 쓰자! 신변잡기는 친구 불러다가 얼굴 보고 하자!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분리하자! 리얼라이프는 오프라인이다! 뭐 이런 식으로 선을 그어놓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