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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사태와 아이러니

bravebird 2015. 1. 13. 00:33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2011년에 중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한 친구가 "중국인 유머에는 아이러니적인 요소가 전혀 없어. 아이러니라는 말에 대한 중국어 번역어조차 제대로 없지. 반어(反语)라는 단어에는 차마 다 담지 못하는 문화적인 뜻이 더 있는데 나도 설명은 못하겠다. 비꼼(sarcasm)과도 달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이후부터 아이러니는 오랜 화두였고 과제였다. 그나마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는 죽쑨 걸 참 잘했다고 반대로 말하는 단순한 수사 차원에 그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개츠비의 눈물겨운 노력이 가져다준 병신 같은 허무한 결말, 연인들이 하는 가장 친밀한 것들을 다 하면서도 자신들의 관계를 사랑으로 규정짓지는 않는다는 요즘 미국 젊은이들의 연애 각본, 2012년 지구를 휩쓸었던 강남 스타일, 내 학부 졸업논문 주제작이었던 김유정 만무방, 이 모든 게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위의 예들을 살펴보면 아이러니는 주로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된 황당하고 다소 희비극적인 상황, 혹은 어떤 기호가 정반대의 내용이나 상황과 연결돼 있는 상황이다. 뒤집어, 어떤 내용이 정반대의 기호와 연결돼 있는 것 역시 해당한다. 나열한 경우들을 조금 더 부연해 보자면, 뮤직비디오 속 싸이 캐릭터는 댄디하고 시크할 것 같은 강남스타일과는 거리가 먼데 주구장창 강남스타일을 부르짖는다. 게다가 그런 촌스러운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한 싸이는 알고보면 강남 출신이다. 절묘한 이중 아이러니. 이쯤 되면 강남스타일이라는 게 바로 싸이가 하는 짓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린다. 만무방의 응칠이는 사람이 순진하고 선한 것이 가만 보면 만무방이 아닌데 만무방 딱지가 붙어 있다. 그래서 벼를 훔쳤다고 의심을 받는데, 억울함을 풀어 보려고 밤중에 논두렁을 지키고 섰다가 진짜 벼도둑을 잡고 보니 동생 응오다. 도둑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삶을 열심히 살고 있는 응오가 바로 그 성실함 때문에 도둑이자 만무방이 되어버린 거다. 만무방이란 대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아이러니는 여러 가지다.

최소한 시작만은 파시즘과 거리가 먼 유로마이단 운동에 파시즘 낙인이 붙어버렸다.

자유나 민주주의하고는 별 상관없는 극우 파시즘 정당이 스바보다(자유)라는 이름을 버젓이 내걸고 있다.

우크라이나 극우 정당인 프라비 섹토르는 러시아 푸틴 정권의 파쇼적 주권 침해를 파쇼적 방법으로 반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총리는 러시아의 파시스트적 침략행위를 규탄하기 위해서 나치와 똑같은 주장(소련이 독일을 침공했다)을 폈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보호하려 하지만 우크라이나 국내정치부터가 파시즘에 기울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 안건 자체는 민족국가라든지 영토 주권, 자유나 민주주의 같은 지극히 근대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전개 양상은 파시즘에 관한 기상천외한 아이러니로 가득찬 포스트모던 그 자체다. 이쯤 되니까 파시즘이 뭔지 헷갈리고 그냥 파시즘이라는 단어 자체가 텅 비어 보여서 무섭다. 그게 바로 아이러니의 위험성이다. 말하는 방식이 심중과는 정반대, 기호도 내용이랑 정반대, 의도도 결과랑 정반대다 보니 모든 게 의미없고 공허하고 이건 대체 웃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지한지조차 모르겠고 얼마나 심각해야 하는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어떤 입장도 분명하게 취할 수가 없고 그저 주머니에 손 꽂고 쿨한 양비론으로 무장한 채, 짐짓 시니컬하게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궁리해도 모호하기가 짝이 없는 아이러니를 무리 없이 이해하고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고지능자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흔한 사회는 고도 발전 사회일 테고. 당장의 생존이 버겁고 일말의 희망이 귀중한 사회에서 시니컬한 아이러니 버섯이 쑥쑥 자라나긴 무리니까. 그렇지만 아이러니가 고도 사회의 산물인 만큼, 반대로 아이러니는 사람들을 고도로 얍삽하고 무력하게 만들고 있다. 진지해서 재미없다는 핀잔을 듣더라도 서툰 진심을 시니컬의 외피 없이 말할 수 있기 바란다. 난 별로 쿨하지 않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용기가 내게 함께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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