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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신분증 구경한 이야기

bravebird 2015. 3. 13. 18:45

최근에 러시아 출신의 지인이 생겨 드디어 신분증을 구경해볼 기회가 생겼다. 예전에 중국인/홍콩인 정체성에 대해서 연구하려는 생각을 했었기에 시민권, 신분등록제, 거주등록 같은 개념에 관심이 있는 편이다. 항상 외국인을 만나면 신분증을 좀 보여달라고 부탁하는 편인데 러시아 것은 처음 봤고 한번 들여다보길 잘했다. 각 나라 신분증을 살펴보면 그 나라 법률이 나라 구성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분류하고 조직해 내는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러시아 신분증은 국내여권(внутренний паспорт)과 국제여권(заграничный паспорт)으로 나뉜다. 국제여권은 기재사항이 한국 여권과 대동소이하다. 이름과 성별, 사진, 생년월일, 출생지, 여권 발급일과 만료일, 발급처, 여권 번호, 소지자 서명 등의 기본 사항이 적혀 있다. 자녀 이름을 기재하는 페이지가 따로 있다는 것이 매우 독특하다. 여권 소지 연령에 도달하기 이전의 자녀가 있으면 이 페이지에 기재하여 국외 방문시 신분증명을 한다. 또 내 기억에, 국제여권에는 국내여권과의 연계성을 보여주는 도장이 찍혀있었다. 한국 여권에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명기하여 한국 국내 신분증명 방식과 연동시켜 놓았다.

 

국내여권은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판이하게 다르다. 일단 외양부터가 정말 여권처럼 작은 공책 모양으로 생겼고 명칭 자체가 패스포트다. 14세에 처음 발급되고 20세와 45세에 교체하는데, 이사, 결혼, 자녀 출생 등 신변에 주요한 변화가 생기면 마치 비자 받듯이 관청에서 도장을 받는다. 가족관계까지 다 개인 신분증에 표시, 관리되는 것이다. 이사를 갈 때 주소지가 적힌 도장을 받아야 하는데, 이 거주등록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공립병원 등 해당지역 공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고 한다. 심지어 사업주는 해당지역에 거주등록하지 않은 사람을 고용하기도 어렵다. (하드코어!)

 

한국에서야 본가를 나와 살면서 그 주소지를 굳이 등록하지 않아도 자취하는 동네의 공공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문제가 없다. 내 주변에는 서울에 산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부산 주민등록에 올라 있는 동료도 있다. 러시아에서는 이게 행정적으로 규제를 받는 모양이다. 이사할 때마다 신분증에 도장을 받고 거주등록을 해야 해당지역 공공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당신이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 다니는지 정부가 일일이 알고 있다.

 

이 등록제도의 시초는 프로피스카(прописка)라는 제도이다. 프로피스카는 제정 러시아 시절 및 1930년대 이후 소련 시기에 실시된 행정제도로, 거주허가와 이주기록 관리가 주된 목적이다. 기본적으로 현대 러시아에서 국내여권에 도장 받는 것과 비슷하다. 국내여권에 도장을 받고, 도장의 공란에 주소를 적어넣는 방식이다. 이 도장을 프로피스카라고 불렀다. 모스크바 거주등록이 되어 있는 사람이면 '모스크바 프로피스카가 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소련인들은 이 프로피스카를 통해 영구거주지를 등록했고, 군복무 및 대학공부 등으로 다른 곳에 일시 거주하는 경우에 임시거주지도 등록했다. 프로피스카를 받지 않은 지역에는 마음대로 살 수 없었다. 등록된 주소지가 이외의 장소에 거주하는 사실이 발각되면 벌금 대상이었다. 이처럼 개인 거주와 관련된 기록을 행정관청에서 엄격하게 관리했으므로 범죄자 및 범죄용의자 추적과 검거가 용이했다.

 

프로피스카는 이처럼 인구 통제 수단이기도 했지만, 정부가 모든 공민에게 주거를 제공해야 한다는 함의 또한 갖고 있었다. 누구나 한 곳의 영구거주지에 등록이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타지역 출신자를 고용하려면 우선 근무지역 거주등록부터 완료가 되어야 했기에, 고용주는 먼저 거주시설부터 설립하여 피고용자들을 입주시켰다고 한다.

 

이 프로피스카 제도는 소비에트 연방 붕괴와 함께 폐지됐다. 거주 이전의 자유를 보장한 러시아 헌법에 정면으로 배치됐기 때문이다. 러시아연방은 1993년부터 프로피스카를 등록제도(registration)로 대체했지만 여전히 프로피스카라는 말은 이 등록제도 자체 혹은 특정 지역에서의 영구거주권(예: 모스크바 프로피스카)을 뜻하는 말로 흔히 사용된다. 러시아 공민은 한 장소에서 90일 이상 체류할 경우 등록을 해야 한다. 여전히 영구거주등록과 임시거주등록이 존재하며, 영구거주등록은 국내여권에 도장을 찍어서, 임시거주등록은 별도의 문서로 작성한다.

 

러시아 국제여권과 국내여권 모두에 민족성은 표시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중국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민족성을 분류하고 신분증에 명기했는데, 어느 시기부터 해당란을 삭제했다고 한다. 그 시기와 배경에 대해서는 별도로 조사를 해볼 예정이다. 참고로 소비에트 시기에 민족 간 혼혈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내 지인은 자신이 추바시, 소러시아, 대러시아, 아마도 유대 혈통까지 복잡하게 갖고 있을 거라 하지만 특별히 자신을 무슨 민족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추바시야 공화국 체복사리에서 살 때, 추바시어로 교육하는 초등학교가 있었다고 했다. 민족어 공교육 현실에 대해서도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물어보겠음.

 

가족관계와 이사 기록까지 다 담고 있는 러시아 신분증을 보고 이 나라 신분등록제는 정말 하드코어하다 생각했지만, 그런 러시아에서도 지문 같은 것은 찍지 않는다.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에 상응하는 것도 더 느슨하게 관리하는 듯 보인다. 국내여권 번호가 한국의 주민등록번호 같은 기능을 하지만, 여권을 교체하면 여권 번호도 바뀐다. 주민등록번호처럼 출생부터 사망까지 한 번 주어져 끝까지 유지되는 번호가 아니다. 은행 계좌를 만들거나 중요한 시험을 치를 때 신분증명을 위해 국내여권 번호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한국처럼 웹사이트 가입할 때마다 일일이 신분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것까지 하면 러시아나 한국이나 신분증명제도 하드코어하기로 양대산맥쯤 될 것 같다. 범죄자나 반체제 인사 잡아내려고 만든 제도 같다.

 

한국에 없는 러시아의 하드코어함 한 가지는, 개인 재직기록 차트(명칭 확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고용 사실, 근무기록, 이직 내역 등이 모두 기재되는 개인별 공식 문건이 있단 뜻이다. 지인이 한국에 갖고오진 않아 구경할 수는 없었는데 이게 가장 궁금하다. 무슨 공무원 재직기록도 아니고 사기업에서 일한 기록까지 공식 관리하지? 극단적이야! 러시아도 참 주민통제 전통이 강한 하드코어 경찰국가구나 싶다. 언론인과 정치인 암살 같은 흉흉한 뉴스도 많이 전해 듣지만, 신분증만 살펴봐도 러시아에 사는 건 빡셀 것 같다. 역시 신분증 한번 구경해보자고 부탁하길 잘했다. 러시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다음번에 더 알아볼 것은
- 러시아 민족정책, 민족어 교육정책, 중국과 소련의 민족정책 비교
- 러시아 재직기록 차트!!
- 곧 러시아 국내여권을 대체한다는 Universal Electronic Card
- 각국의 신분등록 및 거주등록제 (한국 기존 호주제와 현행 1인1적제, 중국 호구제)

 

http://en.wikipedia.org/wiki/Russian_passport
http://en.wikipedia.org/wiki/Propiska_in_the_Soviet_Union
http://en.wikipedia.org/wiki/Resident_registration_in_Russia
http://en.wikipedia.org/wiki/Universal_electronic_card
http://en.wikipedia.org/wiki/Identity_document
http://en.wikipedia.org/wiki/Resident_regi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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