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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허를 찌르는 원피스

bravebird 2017. 9. 8. 13:20

계절 바뀌는데 입을 바지가 없어서 퇴근길에 잠깐 사러 갔다. 한번 옷가게를 가면 다른 것도 죽 살펴보고 입어도 본다. 당장은 살 마음이 없는 옷도 앞으로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감을 잡아보려고 한번 입어본다. 살 옷이랑 매치시킬 만한 건 뭐 있는지 꼭 물어보고 걸쳐본다. 최대한 조합해서 다양하게 써먹어야 하니까. 

어제는 와 이건 뭐 세련되고 우아하기가 그지없는 올블랙 롱 원피스가 있어서 입어봤다. 소재도 디자인도 절제미가 있는 훌륭한 기본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잘 살펴보니 보통 옷이 아니었다. 앞 중간부분이 깊이 수직 절개돼 있고, 갈라져 보이는 안에는 비치는 검정 슬립이 들어있었다. 코피 빵!! 그냥 입고 서있으면 심플한 옷인데 저런 반전이 숨어있는 것이다. 옷이 이 정도는 돼야 입는 재미가 있다. 

메시지가 노골적이고 균형을 잃은 것은 재미가 없다. 칼정장은 하품이 난다. 레오파드 무늬로 도배된 원피스도 마찬가지다. 나 공주요 하고 쓰여 있는 레이스에 주름 가득한 옷도 뻔하다. 글자나 로고가 크게 붙어있는 옷은 말할 것도 없다. 차라리 디테일이랄 게 없는 기본 옷이 나은데,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커다란 틀이 잡혀 있는 가운데 의외의 파격이 가미된 것이다. 

그 원피스는 그런 옷이었다. 단순하고 우아한 가운데 치명적인 파격미가 숨어있는 흥미롭기가 짝이 없는 옷이었다. 그렇지만 당장 생존용 정장도 불충분한 마당에 큰 용처도 없이 20만원이 넘는 옷이라 본전 뽑을 자신은 없었. 입고 휙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옷으로 승부를 봐야 할 일이 있다면 그때 사입기로 하고, 원래 구하려고 했던 5만원 이내의 카멜색 기본 바지를 샀다. 마침 자켓도 다 오래돼서 바지에 어울릴 만한 몇 가지를 입어봤다. 출근용·주말용을 겸해서 확실히 본전을 뽑을 수 있고 이미 가진 것과도 안 겹치는 디자인이 두세 가지 정도 있어서 며칠 고민해볼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원피스, 여운이 상당하다. 단순한 기본 디자인에 긴 앞절개라는 파격이 숨어있는 원피스. 과하지 않지만 뻔하지도 않은 스타일. 단정함 속 약간의 파격, 무심한 가운데 약간의 긴장, 뻔할 때쯤 허를 찌르는 반전, 그런 한방의 훅은 정말로 재미가 있다. 고요한 균형 가운데 잔잔한 파문이 있는 생활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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