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소식(소동파)의 제서림벽 철학적 감상 본문
내일까지 내야 하는 중국명시감상 과제가 북송시대 시 하나 골라서 감상문 쓰는 거였는데 운이 좋게 일필휘지로 써졌다. 왜냐하면 항상 생각하고 있는 주제 그 자체를 다룬 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식론, 존재론, 서양 사상과 동양 사상의 차이, 서양의 진리, 동양의 도 같은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왔다. 특히 최근 며칠새 챗GPT와 이 주제로 이야기도 정말 많이 했기에 이 시를 보고 심봤다고 생각했다.

오래 전에 대학생 시절, 한 미국 사람이 "너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무교인데도 신과 원죄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떨칠 수 없는데 너는 그런 관념 자체를 아예 떠올리지 않는 것 같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매우 흥미로웠기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종교가 없는데도 신과 원죄란 개념을 붙들고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고 굉장히 근본적인 인식 차이를 느꼈다. 나는 신을 믿고 안 믿고의 차원을 떠나, 애초에 신이라는 개념이 필연적이지 않은 문화권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신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무언가이고, 구태여 그 유무를 논증할 필요도 못 느끼는데, 신의 유무가 내 일상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여하간 미국인의 이 말은 나에게 동서양 사유 차이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심어주었다.
또한 철학개론 수업을 들었을 때는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인식론이고 존재론이고 도무지 하나도 절실하게 와닿는 것이 없고 너무나 생경하였으며 과제로 쓰고 싶은 주제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오래 생각해 보건대 나는 뼛속까지 동아시아 사람이기 때문에 서구 철학의 인식틀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내 사고의 근본이 정말 동아시아적인 것 같다. 책 같은 걸로 배워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아래는 과제 전문.
교재에 제시된 북송시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소식(蘇軾)의 ‘제서림벽(題西林壁, 서림사 벽에 쓰다)’이다. 이 시는 내가 평소 자주 생각해온 내용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다음은 '제서림벽' 전문과 그 번역이다.
題西林壁(제서림벽)
橫看成嶺側成峯 (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고저각부동)
不識廬山眞面目 (불식여산진면목)
只緣身在此山中 (지연신재차산중)
서림사 벽에 부쳐
옆으로 보면 고갯마루 가로 보면 봉우리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제각기 다르구나
여산의 참모습 알 수 없는 것은
이 몸이 이 산 가운데 있기 때문이라네
나는 항상 어떤 대상이나 현상은 마치 홀로그램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해왔다. 보는 각도에 따라 드러나는 모습은 다르지만, 각각의 모습은 모두 그 대상이나 현상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이 모든 부분을 동시에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찰자인 인간은 특정한 각도와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는 가능하지만, 모든 관점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기에 어떤 대상이나 현상의 모든 면을 한꺼번에 파악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제서림벽'에서 묘사되는 산줄기와 우뚝한 봉우리,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은 곳에서 바라본 여산(廬山)의 다양한 모습들은, 모두 여산이라는 하나의 산을 이룬다. 그러나 산속에 있는 우리는 여산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여산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오면, 또 여산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이 곧 인간 인식의 딜레마다.
시사 문제, 인물, 역사적 사실 등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와 관점에 따라 부분적인 진실만을 볼 수 있으며, 전체를 동시에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로 인해 동일한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도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시간과 공간이 직조하는 경험적 맥락 속을 벗어날 수 없고, 언제나 조각난 진실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조각난 진실을 절대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식을 조건짓는 상황들을 한 발짝 물러서 상대화해볼 수 있어야 한다. 명상과 같은 수행이 최근 들어 그 필요성을 인정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내가 이 주제에 특히 천착하게 된 데에는 분명한 계기가 있다. 올해 들어 새벽에 잠이 깼다가 다시 잠을 청할 때 자주 자각몽을 경험했는데, 그중 하나가 특히 인상 깊었다. 꿈속에서 나는 내 눈에 착용하고 있던 렌즈를 직접 보게 되었다. 렌즈는 내 눈앞에 분리된 채 떠 있었고, 그 덕분에 나는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렌즈는 매우 투명한 파란색이었으며, 곧 여러 개로 늘어났다. 그 렌즈들에는 나의 다양한 모습이 비쳐 있었다.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깨어 있었던 나는, 이 광경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다가 깨어났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자각몽 속에서는 내 인식을 조건짓는 렌즈와 그 렌즈에 비친 다양한 나의 모습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앎 그 자체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이 관심은 학부 시절 철학개론 수업을 듣게 한 계기가 되었으며, 서양철학에서 인식론이 존재론과 긴밀히 연결된 매우 중요한 분야로 다뤄진다는 점을 알게 했다. 그러나 인식론을 공부하면서 내 사상은 실재론과 관념론 어느 쪽에도 뚜렷이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서양철학과 종교가 내 사고 경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서양의 인식론, 윤리, 종교는 대개 절대자의 존재와 외재적인 진리를 전제한다. 그러나 누대에 걸친 동아시아인 혈통을 지닌 나에게, 그리고 친가와 외가 모두 기독교인이 전혀 없는 환경에서 성장한 나에게, 모든 상황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낯설다. 세계의 존재나 인간의 인식, 윤리 도덕을 논하기 위해 전지전능한 존재를 전제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나는 무신론자나 세속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없는데, 그런 입장들조차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신의 존재 여부에 무관심하며, 신을 부정하거나 떠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신이라는 개념에 특별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편이다.
세계가 실재하는지 관념인지와 같은 서양철학의 존재론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에게 세계란 그저 ‘그렇게 존재하는 것(如是)’이다. 절대자가 주관하는 외재적 진리 개념은 희박하고, 대신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균형과 조화가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자주 생각한다. 이는 동아시아 사상의 '도(道)'나 '중용(中庸)' 개념과 닿아 있다. 도는 도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이미 도가 아니며, 순간순간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유동적인 것이기에, 이런 흐름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절대자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가 없다. 윤리 또한 인간의 동물성과 사회성, 즉 인간 조건 속에서 전지전능한 심판자 없이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자연(自然), 즉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번역어조차 동아시아 사상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동아시아의 ‘도’ 개념과 자연 즉 세계, 그리고 서양의 절대자 내지 절대 진리는 상호 모순에 가깝다. 나의 인식론은 명백히 서양철학보다는 동아시아 사유에 가깝다.
소식의 '제서림벽'은, 인지와 인식, 진리와 도, 동서양 사유 차이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해온 나에게 깊은 울림과 새로운 생각거리를 안겨준 매우 흥미로운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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