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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오피스 지정학 독트린

bravebird 2025. 11. 20. 00:53

나는 어떤 현상을 볼 때 있는 그대로만 보기보다는 비유와 유추를 거쳐 보는 쪽이 더 이해가 잘 된다. 그래서 내가 처해 있는 직장 상황을 하나의 지형으로, 그 안의 사람들을 여러 국가로 상상해 본다. 국방과 외교를 떠올리면 조금은 웃기고 덜 억울하다. 무엇보다 제3자 관점이 생긴다. 그냥 이런 잡생각 그 자체로 재미도 있다.

 

1. 전제: 정치는 인간 조건

사람이 집단에서 살아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정치를 겪게 된다. 자원은 반드시 한정돼 있고, 정치는 그 한정된 자원의 배분 방식이니, 불가피한 인간 조건이다. 밥그릇이라는 생존의 문제를 다루는 직장에선 더더욱 그렇다. 그냥 숨 쉬듯이 정치가 진행 중이다. 모두가 다 플레이어다. 정치라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전혀 관심도 없고, 못 하는 것 같은 사람들의 그 모든 행위조차도 전부 다름아닌 정치다. 꼭 적극적인 대인 공작, 첩보전, 공격이나 수비를 하지 않더라도, 그냥 가만 있기로 하는 것조차 실은 정치 행위다. 

 

2. 목표: 패권 말고 주권

내가 국가라면 직장에서의 나는 확실히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인도는 아니다. 그러니까 세계 제패 내지 지역 패권에 전혀 관심이 없다.

 

  • 높은 고과(A등급)를 받거나,
  • 승진을 하거나,
  • 이너 서클(clique)에 들어가거나,
  • 인정을 받고 이름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동기가 적다.

왜냐? 이것들은 킹론상 좋은 것들이지만 모두 막대한 비용과 함께 온다. 저것들은 물론 좋은 보상일 것이나, 비용 효율이 매우 처참하다. 직장에서의 내 핵심 이익은 언제나 명확하다. "가급적 어그로 끌리지 않고, 귀찮은 일 생기지 않고, 밥그릇 및 퇴근 후 자유가 침해받지 않는 것." 

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저런 것들을 탐하지 않았으나 일은 양심껏 어느 일정 수준 이상으로 잘했다. 그러면 나한테 고맙다고 절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저런 걸 안 노리면, 즉 의전이나 아부 등 적극적인 정치질(politicking)을 하지 않으면, 속을 알 수 없다거나 사회성이 모자란다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결국 욕망을 이용해 휘둘러 볼 수가 없으니 불편하다는 뜻이다. 웃긴 건 또 저런 것들을 목표로 삼고 일도 열심히 잘하고 정치질도 능숙하면? 위협 된다고 찍어 누른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사람에게 사사건건 절대 복종하고 살살 눈치 보면서 바짝 기면? 아주 인간 이하 취급을 하면서 골수까지 푹 고아 마시려 든다. 결국 이래도 욕하고 저래도 욕한다. 그런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이든, 어떻든, 어디에든, 언제든 무조건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나 자신 포함) 비합리적이고, 배신하고, 겉과 속이 다르고, 상호 모순되는 것을 동시에 바라고, 만족을 모른다. 그리고 직장은 그런 인간들이 모인 이전투구의 현장이다.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니 그런 게임에 뼈를 갈면 안된다. 그렇다면 자기 원하는 대로, 자기 주권적으로 사는 게 맞다. 그럼 그걸 위해 내가 선택한 전략은?

냅킨 AI로 생성. 수정이 번거로우니 여기서의 정치는 politicking의 의미로 이해해 주세요.

 

 

3. 전략: 스위스, 핀란드식 중무장 중립

나의 직장 포지션 내지 지향점은 언제나 영세 중립국 스위스나 핀란드에 가깝다. 싱가포르도 좀 비슷하다. 스위스나 핀란드 같은 나라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 같은 나라와는 성격이 다르고, 핵심 이익이 다르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전략전술이 다르다. 단지 그 차이일 뿐, 결국 모든 플레이어는 정치를 한다. (아, 그리고 내 성격 자체가 핀란드 사람들과 굉장히 비슷하다고 항상 생각을 했다.)

 

  • 현실 인정 (핀란드): 시끄럽고 불안한 거대 이웃(러시아)의 존재를 일단 인정한다.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수용한다.
  • 영세 중립 (스위스): 주변 제국들에게 어그로를 끌려주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 그러나 핵심 이익(금고)을 위해 중무장한다.
  • 독새우 (싱가포르): '나를 잡아먹으면 내 몸 안에 있는 맹독 때문에 너도 같이 죽는다.'
  • 결사항전 준비 : 먼저 공격하진 않지만, 공격을 받았을 때 바로 반격할 수 있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4. 참고: 베트남

전술적인 측면(비대칭 전력, 정보전, 부비트랩 설치, 국제 여론 활용)에서 베트남으로부터 배울 것도 있고 유사점도 상당수 있다. 기본적으로 수천 년의 역사를 통틀어 제 힘으로 모든 초강대국을 꺾은 베트남의 미친 깡을 몹시 존경한다. 그러나 직장이란 전장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베트남이 늘 추구했던 '비대칭 전력 상황에서 모든 것을 각오한 완전한 승리'까지는 아니다. 

 

5. 결론: 억지력, 에너지 효율

내가 비록 미약하나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반드시 적을 섬멸하고 창대한 통일을 이루어 내리라는 일종의 베트남스러운 각오를 불러일으키는 그 무언가는 직장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십 년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없었다. 직업을 아예 바꾼다고 해도 그런 일은 절대 없으리라 확신을 한다. 반면 내 몸뚱이와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애착이 많다.

 

직장에서는 떳떳하게 그러나 에너지 효율적으로 자원을 얻겠다. 그건 배우고, 경험하며, 궁금하고 긴요한 것들을 해결하는 데 쓰겠다. 나는 전투(직장)에서 쓸데없이 파멸하지 않도록 핵 억지력을 차근차근 갖출 것이다. 전쟁(삶 전체)에서 반드시 승리해야겠기 때문이다. 

 

자 그럼 오늘도 곧 상호확증파괴의 평화 속으로 한번 출근해 봅시다. 

 

ChatGPT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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