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훈련과 완상 본문
회사가 쉬는 날이어서 안 갔다. 일단 그런 날이면 그 전날 머리부터 안 감고 자야 된다.
난 다음날 아침 볼일이 있을 때는 머리를 감고 잔다. 일정이 없으면 안 감고 그냥 잔다. 여름엔 물론 맨날 샤워하고 맨날 감아야지. 그러나 겨울엔 샤워 빈도가 줄기 때문에 다음날 아침에 인간을 상대하는 일정이 없으면 잔다. 머리까진 안 감고 그냥 누워도 되는 그 자체가 행복의 시작이다.
늦잠을 자고 국궁장에 화살을 주우러 갔다.
나는 활을 잘 못 쏴서 145m 떨어진 과녁까지 잘 닿지 못한다. 화살이 날아가다가 산중턱에 꽂힐 때가 많다. 다행히 거긴 사람은 없는 나무가 우거진 숲이다. 그래서 잃어버리는 거여. 한 발에 1만원이니 국궁이 나한텐 거의 골프급이여... 그래도 사람들이 화살을 계속 주워 오므로 가끔씩 화살이 돌아올 때가 있다. 그걸 거의 1년만에 회수하러 갔다. 돌아온 화살은 많지 않았지만 기분이 상쾌했다.
국궁장까진 버스를 타면 환승을 여러 번 하고 1시간은 걸리므로 시간 절약을 위해 택시라는 사치를 부렸다.
올해는 국궁장은 거의 못 갔다. 토요일에 레슨이나 오케스트라를 다니느라. 일요일은 집에 있어야 되니까.
그런데 대중교통이 불편해서 이렇게 애매하게 멀다 보니까 잘 안 가게 되는 것도 있다.
활터에 오랜만에 올라갔는데 왜 이렇게 좋은겨. 면허를 따고 스쿠터를 하나 뽑게 된다면 자주 가게 될까?
내년에 그냥 국궁 그만둘까 생각했지만 간만에 그냥 가기만 갔는데도 기분이 참 좋다.
내려와서 밥 사먹고 다이소에서 물건 사서 집에 와서 낮잠 때리고 귀멸의 칼날 봤다.
시험공부 비슷한 것은.. 원래 하려고 했으나 결국 하지 않았다.
올해 주 취미를 비올라로 바꿔탄 건 좋은 선택이었다. 올해 연습 시간은 아마 400시간은 가까이 된다.
이전에 시도해봤던 승마도 국궁도 전부 멀리멀리 나가서 해야 되어 접근성이 안 좋고
승마 같은 경우엔 돈도 꽤 들기 때문에 내가 원할 때 여러 번 타서 실력을 확 늘리기가 좀 어렵다.
국궁은 손 근처의 1mm 오차가 과녁 근처에선 수 미터의 차이가 되어 버리는데
내가 잘 쏘질 못해서 조절 자체가 어려우니 조작감이 없다. 그래서 수년간 했으나 본격 재미는 못 붙였다.
비올라는 악기만 사 놓으면 집에서도 수시로 붙잡고 할 수가 있어 좋다.
방송통신대 시험이 이번주 일요일부터 3주간 있다. 이게 마지막 학기다. (물론 대학원도 신청하긴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수업은 밀려 있으므로 기말고사를 코앞에 두고 굉장히 단말마의 고통이 있다.
그러나 매 학기 그래왔고 그럼에도 대부분 A를 받았으므로 이번에도 결국 그렇게 마무리하게 될 것이다.
작년에 여행 및 재취직 때문에 1년 쉰 거 빼고는 쉼없이 4년을 계속해 왔다.
이 근성은 진짜 스스로 인정해야 된다. 이 4년이 내 인생에서 제일 자랑스럽다.
강의가 너무 밀려 놓으니 기말고사 직전엔 몰래 공부를 한다.
점심시간에 으슥한 회의실에서, 또는 퇴근 후에 주변에 사람들이 거의 없으면 1.6배속으로 강의를 듣는다.
이런 행위를 몰래 하려니까 긴장감이 상당하고 무엇보다 굉장히 고독하다 ㅋㅋ
자고로 회사란 데는 예컨대 내가 방송통신대 통계 학사 같은 게 있으면 입사할 땐 좋아한다.
반면 입사한 후에 공부나 독서나 취미 비슷한 걸 하는 것만 보아도 굉장히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ㅋㅋ
그러니 사생활은 숨기고, 없는 시간을 쪼개고 기워 붙여서 몰래 해야 한다. 그러자면 일과는 자정쯤 겨우 끝난다.
일 끝나고, 강의 듣고, 악기 연습하고 오면, 혹은 오늘같이 중국어 수업 11시에 듣고 나면 잘 시간이다.
나는 예로부터 무슨 자격증 따려거나 직업 구하려거나 돈 벌기 위해 뭔가를 배우거나 익힌 적은 없다.
그냥 본업이랑 다른 무언가를 하는 걸 필수적으로 여겼다. 그걸 안 하면 지겨워서 못 버틴다.
그러니까 난 항상 뭔가 동시에 두 가지 이상을 하면서 살았다.
직장인으로서는 그 과정이 굉장히 마음도 바쁘고 고독하다.
그러나 이렇게 고생해서 배우고 익힌 게 한 세상 재밌게 살다 가게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도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ㅋㅋㅋㅋ
느즈막하게 일어나서 음식 만들어 먹고 집안일 하고 밖에 나가서 햇볕 쬐다가
책 좀 보다가 지겨우면 덮고 음악 듣고 차 마시고
천천히 씻고 족욕까지 하고 잘 시간 되면 자고.
해야만 하는 일들이 전혀 없는 상태. 나도 이런 완상의 시간이 너무 좋고 또 간절하다.
그리고 오늘 간만에 회사를 안 가서 그와 비슷하게 지냈다.
모처럼 평일에 쉬는 날이니까 오늘 하루는 훈련 중지. 그저 100% 완상.
하루종일 긴장 속에 일하고 퇴근하고도 자정까지 해야 할 많은 훈련이 있다는 게, 그런 날이 매일 반복된다는 게, 결국 이 모든 훈련은 전부 혼자 분투하는 과정 속에 이뤄지며 다른 왕도가 없다는 게 굉장히 고독하다.
그러나 난 벌인 것들을 결국 항상 잘해 냈으니까 이번 마지막 학기도, 이번 공연도 잘 마칠 것이다.
형성된 것은 소멸한다.
필멸의 몸뚱이로 살아가는 유한한 이 삶을 더더욱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 위해,
간혹 허락되는 완상의 날을 더 간절하게 즐겁게 보내기 위해,
게으르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
그럼 금일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고 이젠 자러 가야지! 아침에 합주 가야 되니까 머리를.. 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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