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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생의 명반 - Waiting to Exhale

bravebird 2017. 1. 9. 16:51



학창시절 내내 수학이 지지리도 발목을 잡았다. 2004년 중3 때 100점 한번 받아보려고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하루는 근처 레코드 가게에 잠시 들렀다. 변색되어 가는 옛날 CD가 있길래 뭔가 봤더니 바로 이 Waiting to Exhale OST였다. 90년대 빠글빠글 머리 아줌마들이 나오는 앨범자켓의 촌스러움이 무색하게도 트랙리스트는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었다. 우선 베이비페이스가 전곡 작곡에 프로듀싱을 맡았다. 휘트니 휴스턴, 아레사 프랭클린, 브랜디, TLC, 토니 브랙스턴, 페이스 에반스, 메리 제이 블라이지 등등 쟁쟁한 미국 흑인 여자 가수들이 빽빽한 트랙리스트를 보니 이름만 믿고 그냥 사도 되는 CD가 분명했다.  


초등학교 내내 귀를 지배했던 SES가 중학교 때 해체해 버리고 마음 둘 곳을 잃어버린 나는 당시 알앤비, 힙합 음악 초심자였다. 테이프를 졸업하고 CD를 막 사모으기 시작했었다. 쟁쟁한 이름으로 가득한 10년 묵은 CD가 단 한 장 남아 있으니 어찌 신비롭지 아니했겠는가! 당장이라도 집어들고 싶었지만 시험을 2주 남겨놓고 이걸 샀다간 집중이 안될 게 뻔했다. 아저씨께 2주 동안만 보관해 달라고 부탁드리고 100점 시험지를 휘날리며 모시러 오겠다고 다짐을 했다. 마침 수학은 제일 마지막 과목이어서 시험이 끝나자마자 신나게 달려올 심산이었다. 


어느덧 시험이 다가왔다. 역대급 마시멜로우를 잠깐 밀어두었던 자제력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느낌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 시험이 끝나고 답안지를 훑어내리다 보니 뭔가 쌔한 느낌이었다. 어? 주관식 답안지에 4라는 숫자 적은 적 없는데...? 알고 보니 답안을 수정하다가 한 문제 빠뜨린 거였다. 다 맞게 풀어 놓고서 이것 때문에 답안이 밀리는 바람에 84점을 받고 말았다. 수학 100점 드디어 한번 받나 했는데 도리어 최저점을 찍고 말았네...???? 어쨌든 끝나긴 했으니 터덜터덜 레코드 가게로 향했다. 시험 끝나는 날이라고 꼬깃꼬깃 넣어온 만원 한 장짜리도 그만 시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집에 와서 만화책을 펴고 CD를 틀었다. 첫 트랙은 휘트니 휴스턴의 Exhale이었다. 벨벳 같은 목소리가 조용한 방구석에 낮게 깔렸다. 그 순간을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한다. 앨범 제목처럼 그야먈로 숨을 내쉬었던 안도의 순간. 아깝게 목표는 못 이뤘지만 시험을 다 끝낸 개운함. 매일 밤늦게 귀가하다가 한가한 대낮에 방에 누운 기쁨. 2주간 CD플레이어에 손도 안 대다가 멋진 새 음반으로 보상받은 뿌듯함. 필생의 명반과의 첫 만남이었다.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플레이 리스트에 항상 들어있는 명곡들로 가득찬 이 음반은 이후 CD장 제일 위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몇 년 전 드디어 영화를 봤다. 그리고 2016년 마지막 책이자 올해 첫 책이 바로 이 Waiting to Exhale이다. 회사에서 잠깐씩 나는 시간을 때우려고 킨들 앱으로 사서 알차게 읽었다. 애리조나 피닉스에 사는 네 명의 흑인 여성이 겪는 일상, 사랑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별 인상이 남지 않았고 사실 소설도 OST가 아니라면 인연이 닿지 않았을 것 같지만 틈틈이 재미있게 봤다. 우아하지만 고독한 커리어 우먼 사바나로 분한 휘트니 휴스턴의 젊은 모습이 유난히 처연하게 기억에 남는다. 백인 여자 직원과 바람난 남편에 대한 분노로 BMW를 불살라 버린 버나딘 역의 안젤라 바셋도 눈에 선하다. 개똥지빠귀(robin)라는 이름처럼 명랑하고 얼빠지고 쾌활한 로빈, 어린 나이에 싱글맘으로 아들을 키운 내공으로 누구보다도 푸근하고 강인한 글로리아. 영화 버전은 캐릭터와 딱 어울리는 배우들을 절묘하게 캐스팅했다. 




2004년은 CD를 사고 비디오를 빌려 보던 시절이었다. 책은 구할 수도 없었으며 있다고 해도 읽을 엄두조차도 낼 수 없는 원서였다. 지난 12년 사이에 레코드 가게와 비디오방은 자취를 감췄다. 컴퓨터로 영화를 내려받고 휴대폰 원클릭으로 소설을 사읽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30대 중반 여자들의 이야기에 이미 많이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커버렸다. 12년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음악만은 그대로다. 제일 좋아하는 두 곡만 골라 봐야지. Wey U는 내 mp3 플레이 리스트 상위권에서 빠진 적이 없는 필생의 명곡이다. 말도 안되게 아름다운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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