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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죠몬 시대 - 무로마치 막부)

bravebird 2017. 2. 16. 15:25

■ 縄文時代

일본의 신석기 시대. 한국의 신석기 시대와는 달리 농경이 시작되지 않았다. 수렵·채집을 기본으로 한 사회였고 빗살무늬 토기가 제작되었다. 




■ 弥生時代

일본의 청동기-철기 시대. 한반도 출신의 도래인을 통해 농경 문명이 전래되었으며 아시아 대륙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민무늬 토기가 만들어졌고, 청동제 무기와 제사도구가 출현하였다. 신도가 성립 발전하였다.




■ 古墳時代

대규모 고분이 건립된 것을 보아 분명한 사회계급이 존재했던 시대. 선사시대가 끝나고 역사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일부와 뒤의 아스카 시대 일부를 합해 야마토(大和) 정권의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 飛鳥時代

현재의 나라에 위치하는 아스카 지역을 중심으로 한 6세기-8세기 무렵의 역사 시대이다. 한반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어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가 탄생했다. 백제의 왕인 박사 역시 아스카 문화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도래인 계통으로 추정되는 소가(蘇我) 씨족이 불교와 왕실 인척 관계를 앞세워 정치적 실세를 잡고, 나당연합군에 패한 백제의 부흥 운동을 지원하기도 할 정도로 한반도와의 관계가 긴밀하였다.


이 시대의 중심 인물로 일본 화폐에도 등장한 바 있는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는 고구려 출신의 승려를 스승으로 삼아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불타버린 담징의 벽화가 있었던 호류지(法隆寺)가 바로 쇼토쿠 태자 시기 건립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쇼토쿠 태자는 스이코 천황의 섭정으로서 수나라에 사자를 파견하는 등 중국 선진 문물과 제도를 수입했다. 12 단계의 관등제를 정비하고 和, 禮 등을 강조하는 17개조 헌법을 제정하는 등 정치체제 확립에 기여하였다.




■ 大化改新

아스카 시대 을사의 변(乙巳の)으로 덴지 천황(天智天皇)과 후지와라(藤原) 씨가 소가 씨를 멸망시키고 오사카 근처로 천도하였다. 덴지 천황은 고토쿠 천황(孝德天皇)을 옹립하고 스스로 황태자가 되어 일본 최초로 연호를 다이카(大化)로 정했다. 다이카 2년인 646년도에 「개신의 조」를 선포하여 다이카 개신을 단행했다. 주요 정책으로는 (1) 호족들이 사적으로 소유하던 부민과 전답을 천황의 것으로 하는 공지공민제, (2) 호적과 호구 대장을 만들어 공민에게 공지를 나누어 주는 반전수수법, (3) 예로부터 내려오는 부역 제도를 폐지하고 논밭을 기준으로 각 고을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는 조용조, (4)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관등제 실시와 예법 개정이 있다. 소가 씨 등의 아스카 호족 중심으로 돌아가던 정치 구조가 천황 중심으로 바뀐 계기가 되었다. 




■ 다이호 율령 (大宝律令)

몬무 천황(文武天皇) 시기 다이호 원년(701) 당의 통치제도를 참조하여 완성된 율령으로, 이 율령의 반포를 일본 율령제의 시발점으로 본다. 왕토왕민사상에 기반한 중앙집권제 고대 국가를 확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중앙 관료기구 성립, 연호 사용, 문서행정체계 도입, 지방 행정단위 정립 등이 이루어졌다. 




■ 奈良時代

장안성을 본따 만든 나라 헤이조쿄(平城京)를 중심으로 한 8세기 무렵의 시대다. 다이호 율령을 바탕으로 한 천황중심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된 시기로, 호적과 계장(計帳)으로 인민을 파악하고 조용조와 군역을 부과했다. 이 시대에 고사기, 일본서기와 같은 가장 오래된 역사서와 문학작품이 등장했다. 중앙에서는 정쟁이 끊이지 않았고, 동북 지방에서는 에조(蝦夷)와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견당사를 통한 당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국제적인 성격의 문화가 두드러졌으며, 특히 중국풍·불교적 성격의 덴표 문화(天平文化)가 번성했다. 호국불교(鎭護國家) 이념을 바탕으로 불교가 발전했고, 화엄종의 대본산인 도다이지(東大寺)도 이 시기에 조영되었다. 




■ 平安時代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 794년부터 겐페이 전쟁이 끝나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개창한 1185년까지를 지칭한다. 나라 시대에 천황 중심의 율령제가 확립된 이후로 헤이안 초기에는 천황의 통치가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과 승려의 세력이 성장하여 율령체제와 중앙집권제가 흔들린 시기이다. 중앙에서는 외척 후지와라씨 등의 특정 가계가 섭정과 관백을 독점하면서 셋칸케(摂関家)가 확립되어 귀족 정치가 전개되었다.


11세기 후반에 황가가 권력을 회복한 이후에는 인세이(院政) 제도가 시작되었다. 인세이는 천황이 황태자에게 양위한 후, 즉위한 새 천황을 대신해서 상황이 정치를 하는 형태의 통치형식을 뜻한다. 상황이 인(院)이라 불리는 곳에 기거했던 것이 명칭의 유래이며, 이후 인(院)은 상황을 지칭하게 되었다. 인세이는 제위계승이 장자계승으로 고착화되지 않은 채 황위 계승이 외가의 권세에 좌우되던 일본 황가의 특성과, 강력한 외척과 천황들의 유착 및 갈등 상황에서 탄생하였다. 


이 인세이 시기에 상황이 장원의 소유주로 부상하면서 장원공령제 체제로 이행하고 중세가 시작되었다. 셋칸케를 중심으로 한 관직 세습이 고착화되었으며, 중앙 권력은 후지와라씨 외척과 황가가 장악하였다. 측근 정치에 의해 각종 사회문제가 불거지자 상황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황손 무사씨족을 중용하였고, 이들이 토지소유자 혹은 지방관으로 활약하는 지방 무사 세력과 유착하여 봉건적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 중 두각을 나타낸 세력이 바로 겐페이 전쟁의 주인공인 미나모토 가문과 타이라 가문이다. 유력 세력이 장원을 소유함에 따라 율령제의 기본을 이뤘던 개인별 지배체제를 고쳐 토지를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하면서 봉건화가 촉진되었다. 


이 시기에는 견당사가 중지되고 대외교류가 큐슈의 다자이후에 국한되면서 국풍문화라는 독특한 귀족문화가 발달했다. 가나의 서체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이다. 음양오행, 천문, 기상, 지리 등을 연구하는 음양사가 길흉을 점치고 퇴마를 행하는 등 일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겐지 모노가타리, 고금와카집 등이 이때 쓰였다. 




■ 源平合戦 (1180-1185)

헤이안 시대 말기의 명문 무사 가문인 미나모토(源) 씨와 타이라(平) 씨 사이의 내전. 헤이시가 페배하고 겐지가 전국을 장악하여 가마쿠라 막부가 수립되었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는 막부 수장인 쇼군을 제수받았다. 


인세이로 섭정을 맡고 있던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이 헤이시의 우두머리인 타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와 갈등을 빚어 그를 축출하려 하였다. 기요모리는 이 시도를 분쇄하고 오히려 인세이를 폐하고 친손자를 천황으로 즉위시켰는데, 이는 겐지들에게 헤이시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켜 가문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승리한 겐지 일파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가마쿠라 막부를 개창한다.




■ 鎌倉幕府 (1185-1333)

겐페이 전쟁에서 승리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에 임명(1192)되어 가마쿠라에 근거지를 둔 막부를 개창한다. 무사계급이 일본 천황, 귀족계급과 분리된 새로운 지배체제로, 무로마치 시대와 에도 시대를 거쳐 1868년의 메이지 유신까지 지속된 막부 체제가 개막하였다.


교토의 조정과 지방의 장원이 병존하는 이원적 지배구조를 취했다. 쇼군은 주종관계의 계약을 맺은 고케닌(御家人)을 지방에 파견하였다. 쇼군은 고케닌에게 땅을 하사하고, 고케닌은 그 대가로 봉공 및 군역을 바쳤다. 이 고케닌을 다스리기 위해 슈고(守護)와 지토(地頭)를 보냈다. 슈고는 군사경찰권을 갖고 치안을 담당하며 고케닌들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고, 지토는 조세를 징수하고 경작지를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각 지방에는 조정에서 보낸 고쿠시(国司)도 있었지만 실권을 막부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슈고의 영향력이 더 컸다. 


[이 슈고가 후대의 무로마치 시기에는 쇼군으로부터 받은 군사경찰권을 넘어 실질적으로 다이묘(영주)를 겸하는 슈고다이묘로 성장하여 지방의 실세 역할을 한다. 무로마치 말기의 오닌의 난 이후 전개된 센고쿠 시대에는 하극상이 난무하는 혼란을 틈타 다이묘가 된 자가 등장했고, 대토지를 기반으로 관료제와 상비군 및 독자적인 법과 제도를 시행하면서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하였다.]


요리토모 사후 3대 쇼군을 끝으로 요리토모의 혈통이 단절되었다. 이를 틈타 고토바 상황이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조큐의 난(承久の乱)을 일으켰으나, 요리토모의 미망인인 호죠가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들을 규합하고 승리하여 조정에 대한 막부의 우위를 굳혔다. 이 호죠 가문에 의한 섭정(싯켄, 執権)을 통해, 쇼군은 비록 명목상의 권한만을 가졌지만 막부체제는 계속되었다


1274년과 1281년에 원의 대침략이 있었으나 두 번 다 태풍으로 인해 실질적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일본은 독립된 나라라는 의식이 생겨나 후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침략에서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외침인 관계로 출정한 무사들에게 은상을 하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막부와 무사 사이의 신뢰 관계에 타격이 생겨, 반막부 세력이 점점 힘을 얻기 시작했다. 싯켄의 힘도 약화되면서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이 끌어들인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 연합군에 의해 1333년 겐무 신정이 시작되었다. 




■ 建武新政 (1333-1335)

고다이고 천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고 친정한 시기를 일컫는다. 그는 교토로 귀환한 후 막부와 관백을 폐하고 천황이 친정하는 체제를 선포했으나,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모리요시 친왕이 서로의 공을 내세우며 크게 반목하는 등 갈등의 요소가 많았다. 결국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천황과 모리요시 친왕 사이를 이간질하여 유배 보냈다. 호죠 씨의 잔당도 재집권을 위해 나카센다이의 난(中先代の)을 일으켰는데, 다카우지는 이를 기회로 삼아 모리요시 친왕을 살해하고 겐무 신정에 반기를 들었다. 결국 다카우지는 교토로 입성하여 북조를,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도망쳐 남조를 대표하는 60여년 간의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 남북조 시대 (1336-1392)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을 요시노로 내쫓고 고묘 천황을 세운 1336년부터, 고다이고 천황의 남조가 항복한 1392년까지를 가리킨다. 무로마치 시대의 초기이다. 승자는 북조이지만, 메이지 천황 이후로 진짜 정통은 남조로 인정받게 되었다. "친왕"으로 불리던 후계들도 훗날 천황로 추숭되었다. 이를 남북조정윤론(南北朝正閏論)이라 한다. 현재도 천황의 대수는 남조를 기준으로 세지만, 역사학계에서는 남북조의 병립이 정설로 되어 있다.




■ 室町幕府 (1336-1573)

초기의 남북조 시대와 후기의 전국시대를 포괄한다.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치세에 남북조가 통일되었고, 교토의 무로마치 어소가 지어졌으며 금각사도 이때 창건되었다. 하극상 풍조가 만연했고 농민 봉기인 잇키(一揆) 등이 활발했으며 서민 문화가 태동했다. 우경과 모내기의 확산으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시장과 도시가 발전하였다. 가마쿠라 시대에 비해 한층 세력이 커진 슈고가 다이묘의 성격을 겸하면서 슈고 다이묘로 발전하여 지방 실세로 대두하였다. 일본사를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국(明)과 조공 관계를 맺었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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