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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커시리 파수꾼 이야기

bravebird 2017. 11. 9. 14:36

※ 이 글에는 영화 <커커시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뭔가 탄로나면 재미가 없어지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읽으셔도 무방할 듯 합니다. 









<커커시리>는 굉장히 뛰어난 영화다. 2012년 이후 오랜만에 다시 보고 일이 미치도록, 정말 곧바로 미쳐버릴 만큼 없는 틈을 타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고 글을 쓴다. 처음 본 당시에는 영화만 보면 잠에 빠지는 몹쓸병을 앓고 있어서 보다가 잠들었던 것 같다.


배경은 중국 칭하이의 커커시리 무인지구다. 당시 커커시리는 지금처럼 국가급 자연보호구가 아니고 그저 황량한 오지였다. 여기서 티베트 영양이 가죽 때문에 밀렵꾼들한테 엄청 죽었다. 개체수는 수백만에서 수만으로 줄었다. 이에 1992년도에 소남다제(索南达杰)를 대장으로 한 티베트 남자들이 순찰대를 만들어 목숨을 걸고 파수꾼 활동을 했다. 그 순찰대장은 영화 속에 르타이(日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커커시리


티베트 영양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니 처음에 왜 졸았는지 이해됐다. 배경음악이나 클로즈업처럼 감정을 고조시키는 요소가 별로 없다. 거친 대자연 속에 사람들이 점처럼 보인다. 순찰대가 멀끔한 제복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들 조그맣고 행색이 비슷한 가운데 저 놈이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피아식별이 안 돼서 졸린 것이다. 피차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누구는 순찰대가 되고 누구는 밀렵꾼이 되어 서로 쫓다가 쫓기다가 한다. 그리고 대자연 앞에서는 다들 점이다. 영웅의 죽음도 눈보라 속에서는 미미한 점이다. 카메라가 영웅 대접을 전혀 안 해준다. 밀렵꾼들도 눈보라가 깜빡 삼켜버리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리된다. 모두 원경으로 담담히 보여주는데 너무 마음이 막막해진다. 눈물짜는 드라마는 감정을 휘두르려는 것 같아서 별로고, 뻔하고 착한 교훈 이야기는 하품나서 싫은데, 그냥 멀리서 담담히 보여주는 커커시리 같은 영화는 개인적인 감정과 생각을 그냥 조용히 겪도록 해준다.

 

실제 소남다제는 밀렵 현장을 급습하다가 밀렵꾼 한 명을 사살하고는 자신도 곧 대퇴부에 총을 맞고 출혈 과다로 죽었다. 사체 발견 당시 총을 들고 사격 자세로 얼어있었다고 한다. 티베트에서는 보통 천장을 행하지만 소남다제는 활불 급으로 예우하여 화장을 치러주었다고 한다. 소남다제 살인에 연루된 밀렵꾼 중 일부인 6명은 17년이 지난 후 자수했다. 소남다제의 죽음은 그 파장이 엄청나서 커커시리는 곧 국가급 자연보호구로 지정됐다. 지금 그 입구에는 소남다제 동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었을 만큼 거친 곳이라 지금도 자유 방문은 불가능하고 여행단을 통해서만 입장이 가능한 것 같다. 칭짱열차를 타고 라싸에 들어가는 길목인 칭하이 거얼무에서 갈 수 있다. 나는 반드시 티베트와 그 주변 지역을 장기 여행하고 말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그때 소남다제의 동상에 인사를 하면 좋겠다. 



 

소남다제와 자바도르제 (좌, 우 순서대로)


인터넷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은 중요 정보도 있다. 소남다제에게 감화된 매부 자바도르제(扎巴多杰)의 존재다. 자바도르제가 대를 이어 커커시리 보호 활동을 계속했지만 1998년도에 집 근처에서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마침 바로 어제(11/8)가 기일이었다. 자살로 공식 종결됐지만 아직도 배후가 수상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자바도르제와 커커시리 순찰대에 대한 다큐멘터리 <평형>의 감독 펑후이(彭辉)는 <커커시리> 주인공 르타이의 원형이 소남다제뿐 아니라 자바도르제의 몫도 크다고 이야기한다. <커커시리>의 감독 루촨(陆川)이 펑후이에게 말하길, 주요 이야기는 자바도르제한테서 많이 따왔다고 한다. 소남다제가 워낙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가 활동하던 시절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주인공 르타이는 소남다제와 자바도르제를 합친 것이다.


자바도르제가 펑후이 감독에게 남긴 말이다. "저는 밀렵꾼이 무섭진 않습니다. 그 사람들도 총이 있고 나도 있으니까요. 두려운 건 대자연입니다."


<평형>을 보고 나서 뭔가 추가하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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