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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저씨, 파견직

bravebird 2021. 2. 24. 20:07

 

추천이 자자한 <나의 아저씨> 거의 다 봐간다. 대기업 파견 직원으로 나오는 이지안(아이유)이 박동훈 부장(이선균)과의 교류를 통해 저런 명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서, 예전에 전회사에 다닐 때 써둔 글 중에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배경 이야기


전회사는 대졸 공채 정규직 사원(나 같은 사람)을 4급 사원으로 분류했다. 이들 이외에 수출입 서류 작성이라든지 비품 정리 등 비교적 간단한 서무를 담당하는 파견직 여자 직원이 굉장히 많았다. 이들 중에 남자는 없고 전부 여자였으며 학력은 고졸 혹은 초대졸이었다. 이 직원들이 정규직 5급 사원으로 대거 전환된 적이 있는데, 파견직과 5급 직원에 대해서 사람들은 항상 책임감이 없다고 불만이 많았다. 

파견직 및 5급 사원은 속칭 '여직원'이라고 불렸다. 정규/비정규직 관계를 표면화하는 '파견직'이라는 단어, 혹은 급을 나누는 '5급 사원'이란 명칭이 껄끄럽기 때문에 모든 것을 얼버무리기 위해서 그냥 '여직원'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 블라인드에서 이 '여직원'이라는 명칭에 대해 누군가 온건하고 차분하게 문제제기를 했다. 

나는 그 글에 정말 동의했다. 일단 4급 사원이거나 대리 과장인 여자 직원도 있기 때문에 '여직원' 호칭은 포함관계가 틀려먹은데다가 껄끄러운 문제들을 죄다 호도하고 있고, 이런 걸 다 떠나서 일단 비즈니스 상황에 너무 안 어울리는 아마추어적 호칭이라고 평소 항상 생각했었다. 특히나 평소에 '여직원은 책임감이 없다'라는 비난을 할 때만 쓰는 범주인데, '여직원'이란 말을 들으면 저기 나 같은 여자 대리도 포함되는 건지 아닌 건지 혼란스러웠다.  

톤을 정제해서 쓰고 읽고 고치고를 수없이 반복한 후 내 의견을 달았다. 내 댓글은 수십 건의 추천을 받았지만, 글 자체를 읽지 않고 '쿵쾅이'라느니 '메갈'이라느니 일단 내뱉고 보는 사람들도 너무 많았다. 정말 놀랐다. 이곳에는 희망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도 이미 떠날 생각이었지만 이걸 티핑 포인트 삼아서 회사를 옮기기로 마음을 먹었고 곧 실천에 옮겨서 탈출에 성공했다. 그래서 블라인드는 지금 계정도 없지만 이 글만은 기념으로 저장해 놨었다. 



파견직에 대해 내가 2018년에 남겼던 글

※ 파란색 부분은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부분이다.

왜 그 글('여직원'이라는 호칭에 대한 문제제기의 글)을 '비서서무여직원'이 썼을거라 생각하시는지. 저 포함 대졸공채로 들어온 많은 여성 직원들이 '여직원'이라는 워딩에 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나도 여직원인데 이 그룹에선 여직원이라는 말이 하위직을 뜻하는구나. 수적으로나 지위상으로나 압도적으로 비주류구나. (몇 년 전에 세어봤는데 여성직원이 전사 10프로쯤 되나요? 최고위직이 과장이고 지금 다섯 분쯤 되죠?) 내가 열심히 한다면 제도상으로야 제약이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책임자 되기까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어차피 고위직, 이너서클이 되기 어렵다면 시키는 일만 적당히 빵꾸 안 내고 시간 맞춰 하면서 각자 먹거리 궁리하는 게 합리적이다. 괜히 힘빼지 말고 힘 절약하자... (똑같은 논리로, 인사적체 있는 조직이라든지 친목질 등으로 승진시키는 회사라든지 만년부장들이라든지 시한이 정해진 일자리에 계신 분들 비슷한 생각 하시죠?)

파견직원이야말로 딱 저 생각일 거예요. 저는 그래도 대졸공채니까 저런 생각 가지면 양심없다 비난하셔도 할말없습니다만, 파견직원들에겐 저게 당연합니다. 헌신해봐야 정확히 2년 후에 헌신짝 되는데 미쳤다고 헌신하나요. 전 4급사원 일까지 자기 일처럼 도맡아 해주다가 2년 후 내팽개쳐진 파견직원을 봤습니다. 이 회사에서 본 그 누구 앞이라도 당당할 만큼 똑똑하고 책임감 있고 일을 잘했는데 회사는 합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어요. 모두가 그걸 봤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평등도 상대적 평등이어야 정당해요. 헌신했을 때 돌아오는 보상의 기댓값이 다른데 같은 헌신을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인가요?

말씀하신 일부 구성원(파견직원, 5급 직원)의 문제 있는 태도에는 공감합니다. 저도 겪어봤고 욕 많이 합니다. 사람 사는 데니까 이상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개개인이 회사 실태를 봐가며 나름의 합리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 노력과 헌신과 직업윤리 당연히 정말 중요합니다.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인적자원을 중시하고 먼 미래를 생각하는 회사라면 직원들이 개인 차원의 합리성까지 포기하고 그저 헌신하길 요구하기보단,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을 때 그에 합당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도록 체제를 디자인하고 운용해야 할 겁니다. 물론 쉽지 않죠. 그래도 작은 시도라도 해야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포함관계가 잘못된 여직원이라는 비논리적 워딩으로 구성원들이 혼란을 느낍니다. 저 단어가 왜 쓰이나 배경을 한 단계 더 파고들다 보면(여자 직원이 소수, 그 대부분이 하위직) 멀리 바라보고 노력할 동기도 꺾입니다. 그 대가는 크죠. 이런 쓸데없는 낭비가 제거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야심을 갖고 기대도 품고 길게 보고 회사에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어서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심정이나마 글을 써봅니다. 참고로 제가 지금까지 길게 언급한 문제는 억울한 고과 맞고 주홍글씨 찍혀서 진급 누락한 바람에 앞으로의 진급도 어렵지 않나 걱정하시는 수많은 남자 임직원들도 비슷하게 겪고 계십니다. 회사 안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결과에 한계가 보여 갑갑하고 로열티가 떨어진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저는 이게 결국 모두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그냥 한번쯤 이런 말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냉소하기보다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자리이지만 10퍼센트의 자리이기에 버텨가며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기회가 있을 때 작은 의견이나마 보태는 것도 회사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길게 적었습니다. 모두들 이곳에서 투입한 노력 그대로 보상 받으시고, 기대를 꺾을 필요 없이 진취하실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오늘 덧붙이는 생각

사실 이 글을 남길까 말까 고민을 했다. 

1. 오해를 살 수 있는 민감한 주제. 
2. 실제로 이 글을 쓰고 받았던 오해.
3. 글은 읽어보면 점잖게 파견직 편들어주는 듯 한데 사실 나도 파견직 중에 거의 뭐 이가 갈릴 만큼 싫은 사람 많았음. (근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서, 파견직 출신 몇 사람이 너무 싫은 것과 이런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것 사이에서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못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둔다. 날 연옥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해준 글이며 나의 사고방식이나 수법에 대해서 많은 것을 보여주는 글이다. 

1. 편나누기 진짜 싫어함. 같은 편이 될 수 있는 사람들끼리 왜 싸우는지 도무지 이해 못함. 정치적으로 바보짓. 
2. 유추를 좋아함. 나이 어린 여자 파견직과 승진 누락된 남자 정규직 사이에서 기어코 공통점을 찾아내야 됨.
3. 상대방의 논리로 상대방을 자승자박 시키기 좋아함. 일 안하는 파견직에 대한 상대적 평등 운운하길래, 똑같이 상대적 평등이란 말을 사용해서 노력에 대한 보상의 기댓값이 명백히 다른데 어떻게 같은 노력을 바라냐고 반박함.

당시 우리 회사는 정치에 밀려서 억울하게 고과 못 받고 진급 누락한 좀비들이 많았다. 저조한 고과로 주홍글씨가 찍혀서 사기가 꺾인 아저씨들이나, '여직원은 충성심 없다'라는 프레임의 희생자가 되어 회사 대충 다니는 나이 어린 여자 파견직들이나 결국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는 것 아닌가? 낙인효과의 문제. 그러면 이들은 같은 편이 되어서 공동 목표를 도모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여직원'이라는 범주에는 성차별 이슈도, 비정규직 문제도 분명 관련돼 있다. 전 회사는 여자 사원만 파견/계약/5급 정직원/4급 정직원이라는 네 단계로 쪼개놓아서 그들 간에 화합하기가 도저히 어려운 구조를 만들어놓았다. 같은 직급끼리 저렇게 쪼개어 놓으면 이이제이, 소위 '여적여' 문제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다. 반면에 남자 사원에게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 문서를 정리하거나 커피를 타오는 서무를 시키려고 남자 파견직을 뽑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남자 사원 중에도 파견, 계약직이 있었으면 '남적남' 문제가 반드시 발생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성별 문제나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는 분명 중요 요소이지만, 그걸 논하는 것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주변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괜히 소모적인 싸움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난 이게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는 '기대수준이 사람의 행동을 정한다'라는 낙인효과의 문제라고 봤다. 그래서 이 '여직원' 사안이 여자 비정규직이나 남자 정규직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며, 회사의 기대와 보상 체계부터 바로잡혀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다. 이렇게 남녀, 정규직 비정규직이 편을 나눠서 싸우면 이득을 보는 것은 애초에 그런 갈등구도를 조장한 회사 아닌가? 다행히 그 뜻을 헤아려준 사람들도 많았지만 아닌 경우가 참 많았고 그런 경우에는 반응이 극단적으로 저속하며 실망스러웠다.

저건 지금 다시 보아도 '쿵쾅이'나 '메갈' 스타일의 글은 아니다. 심지어 그들은 내가 제일 한심하게 생각하는 부류다. ㅋㅋㅋㅋㅋㅋㅋ 아 혹시나 몰라서 덧붙이지만 그 반대 진영 '일베'도 당연히 싫습니다. ㅋㅋㅋ 여하간 이 글에 대한 반응을 보고 내가 떠나는 게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날 뽑아놓고 너무나 쓸 줄을 모르는 회사라는 생각을 했고(ㅋㅋ당돌ㅋㅋㅋㅋㅋㅋㅋ) 그런 곳에서 더 이상 시간낭비 하지 않고 싶어서 머지않아 옮겼다. 말한 것에 책임을 져야지. 나 역시 회사에 기대가 없으니까 기대를 갖거나 떠나거나. 

"여직원은 책임감이 없다."라고 말하고 다니고 실제로 대접도 그만큼만 하면서 도대체 그들에게서 뭘 더 기대하는지 모르겠다. 아직까지도 못 알아먹은 사람이 여긴 없을 거라 믿지만 혹시나 해서 다시 덧붙이는데, 난 '파견직' 내지 '여직원'이라는 단어를 계기로 삼아서 낙인효과 내지 피그말리온 효과 전반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을 뜻대로 부리고 싶다면 우선 믿고 기대하자. 기대하는 만큼 잘해주자.

옛날에 또다른 드라마 보다가 기억해놓은 대사가 하나 생각난다.
"疑人不用,用人不疑" (의심 가는 사람은 쓰지를 말고, 쓰기로 한 사람은 의심을 말자.)

이 상황에 보다 적확한 문구로는 이런 것이 있겠지.
사(士)는 위지기자사(爲知己者死)이며
여(女)는 위열기자용(爲悅己者容)이라.
(사마천 『사기』 중)
즉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 수천 년 전의 아재가 쓴 글임을 감안해서 '사람은 인정을 받으면 최선을 다한다'라는 주요 메시지만 봐주십시오.

 미라이 공업 야마다 아키오


후일담으로, '여직원'이란 말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주신 사우 분과는 그때 익명의 개인 메시지로 따로 얘기도 나눴었다.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오해 없이 알아듣는 사람이 회사 안에 존재한다는 게 반가웠던 것 같다. 우린 서로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뭔가 이것과 관련된 문제를 위해서 회사에 할 수 있는 것을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하기로 약속을 했었다. 나는 퇴사하면서 가급적 솔직한 의견을 자필로 적어서 남기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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