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헝가리인 매드 티베톨로지스트 알렉산더 초마 (3) 본문
초마가 잔스카르에 다시 나타난 것은 푼촉에게 부담이었던 것 같다. 당시 티베트는 은둔 국가였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티베트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간첩 행위로 간주될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푼촉은 장라보다 더 외진 곳으로 가자고 했다. 바로 잔스카르의 푹탈 사원이다.
푹탈 사원은 잔스카르의 하이라이트 그 자체이자 내가 잔스카르에 간 이유이다. 2019년 심라에서 만난 콜카타 친구 라제스와리가 2022년에 추천해준 후 꼭 가고 싶었다. 라제스와리는 도로가 부설되지 않았을 당시 3일씩이나 트레킹을 해서 푹탈 사원에 갔다. 라제스와리가 일부러 고생을 자처한 게 아니라 걸어서만 갈 수 있을 만큼 심산유곡에 있다. 2024년 6월 23일에 내가 갔을 때는 접근성이 대폭 개선되어서 트레킹은 단 1시간이 걸렸다.
잔스카르 교통편에 대해서는 따로 적을 필요가 있다. 나는 레가 아니라 히마찰 프라데시 라홀(Lahaul)에서 잔스카르로 갔다. 좀더 자세히는, 마날리에서 출발한 셰어 택시를 라홀에 있는 곤들라(Gondhla)에서 탔다. 신쿨라(Shinku La)를 넘어 잔스카르로 들어온 다음에는 푸르네(Purne) 마을 인근의 푹탈 공영 주차장(Parking for Phuktal Trek)에 내렸다. 여기서부터 1시간 걸어 도착했다. 8시 반 곤들라 출발, 13시 반 푹탈 공영 주차장 도착, 15시 푹탈 사원 도착.
마날리에서 잔스카르로 가는 차는 라홀을 거칠 수밖에 없게 돼있다. 그런데도 라홀에서 바로 출발하는 교통편은 없다. 라홀의 키롱(Keylong)에 있을 때 HRCT 버스스탠드도 일부러 가서 확인한 사실이다. 키롱에서 레에 가는 버스는 새벽마다 있지만 잔스카르 가는 차는 없다. 즉 히마찰에서 잔스카르를 가려면 애초에 마날리에서 셰어택시를 타야 한다. 운임도 1인당 2500루피로 매우 비싸다. 잔스카르 파둠에서 레에 올 때도 셰어택시 뒷자리가 2500루피였다.
나는 어떻게 라홀에서부터 갔냐면, 농장 일 때문에 고향 라홀에 와있던 라제쉬 덕분이었다. 라제쉬가 지인께 부탁을 했다. 이 지인께서 라홀 곤들라의 홈스테이까지 태우러 와주셨다. 운전을 해주신 텐진 아저씨는 딸 결혼식을 준비하러 마날리에 장 보러 갔다가 귀가하시는 참이었다. 나는 푹탈에서 1박을 한 후 내려와 텐진 아저씨가 사시는 차(Cha) 마을로 가서 이웃집인 텐진 틴레 아저씨의 홈스테이에서 2박을 했다. 이틀이 꼬박 걸리는 라다크 전통 결혼식에도 참가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라제쉬가 얘기를 다 해준 덕분이다.
푹탈 사원으로 올라가는 트레킹 루트는 필설로 다할 수가 없는 비경이다. 길은 생각한 것보다는 잘 닦여 있지만 작년에 낙석 사고로 네팔인 한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텐진 아저씨께서 항상 머리 위를 살피며 빠르게 걸어 지나가라고 당부해 주셨다. 나는 승려인 조카를 푹탈 사원까지 데려다주러 온 파드마 틴레 일행과 함께 걷다 보니 금방 왔다. 푹탈 사원 게스트하우스에도 방이 있었다. 1박 1500루피에 아침과 저녁식사 포함이다. 잠자는 데 불편은 없다. 단 핸드폰 충전 등 콘센트 전기 사용은 저녁 8시부터 9시 사이에만 가능하다. 화장실은 형식적이며 온수도 주방에서 데워준 물을 써야 해서 샤워나 샴푸는 불가능하지만 어차피 씻기엔 추워서 상관이 없다.
초마와 푼촉은 이곳에서 공부를 이어갔으나 푼촉은 이전만큼 열정적이지 않았다. 몇 주씩이나 자리를 뜨는가 하면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또 이곳에서 초마는 후원자였던 윌리엄 무어크래프트가 부하라로 가는 중 열병으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한다. 아시아틱 소사이어티의 호레이스 윌슨으로부터 티베트어에 관한 에세이 한 편을 평가해 달라는 부탁도 받는다. 자신 이외에도 티베트어를 연구하는 유럽인이 있다는 것은 초마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결국 초마는 1년 후 사바투의 동인도회사로 돌아가서 연구 성과를 영국에 보고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곳엔 더욱 실망스러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초마가 푹탈 사원에 있는 동안 영국령 인도 정부는 한 침례교 선교사로부터 티베트어 사전을 확보하여 편찬하게 된다. 초마를 기다리지 않은 것이다. 이미 티베트어 사전 확보라는 목적이 달성되어 버렸으므로 초마에게 제공하던 지원금도 끊어 버린다. 초마는 티베트어 문법과 문헌 연구라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해줄 것을 요청한다. 다행히도 먼저 출간된 티베트어 사전이 별로 쓸모 없다는 사실이 곧 발견되면서 1827년부터 지원금을 다시 수령하게 된다. 초마는 이때부터 3년간 매우 생산적인 시간을 보낸다. 2년 전 헛걸음 했던 카눔에서였다. 이번에는 인도 정부와 라다크 정부 사이에 제대로 이야기가 되었는지 푼촉이 다시 교사로 지정되어 열과 성을 다해 초마를 가르친다.
초마는 카눔에서 비교적 풍족한 생활이 가능했으나 정신적으로는 거의 광인이었다. 한 프랑스인이 초마를 초대한 적이 있는데 초마는 바로 응하여 찾아갔지만 자리에 앉는 것은 한사코 거부했다고 한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은 권위를 거부하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그래서 프랑스인 역시 앉을 수가 없었다. 손님만 세워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은 한참 동안이나 앉을 것인지 말 것인지 실랑이를 하다가 헤어졌다. 그 다음날 프랑스인이 초마를 찾아갔는데 초마는 싫어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서있겠다고 고집했다. 프랑스인은 키가 컸고 천장이 낮아 도저히 서있을 수 없었기에 결국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초마는 매우 지쳐 있었다. 이제 티베트어 사전은 거의 완성됐으며 초마는 인도로 돌아가 출판을 하고 자신의 성과를 학계에 알리려 했다.
초마는 1831년에 콜카타에 도착하여 아시아틱 소사이어티의 사서가 된다. 이곳에서 티베트어 사전을 완성하여 1834년에 두 권 분량으로 출판한다. 이로써 그간 영국이 해준 지원에 대한 모든 빚을 갚고 자유를 얻는다. 이에 초마는 2년간 산스크리트어, 벵갈어, 마라티어를 마스터하며, 아시아틱 소사이어티에서 히말라야 은둔자처럼 극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연구에 몰두한다. 가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의 학설을 이해하거나 검증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처럼 초마는 티베트어 사전 집필이라는 필생의 과제를 달성하고 구사할 수 있는 언어도 무려 17개까지 늘렸다. 그러나 헝가리 민족의 뿌리를 찾겠다는 애초의 목적은 여전히 달성하지 못했다. 결국 초마는 티베트 국경을 넘어 라싸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고 달라이 라마의 서재에서 헝가리인의 근원에 대한 문헌을 찾아본 다음 야르칸드에 가기로 마음 먹는다. 초마는 마치 죽음을 준비하듯 티베트에 대한 모든 자료를 아시아틱 소사이어티에 맡긴다. 이후 이 자료들은 헝가리 과학원에 이관된다. 또한 자신 앞으로 온 편지는 헝가리에서 온 것을 제외하고는 전달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
초마는 1842년 다르질링으로부터 고갯길을 넘어 티베트로 들어가려고 길을 떠난 후 다르질링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하여 그곳의 양지바른 공동묘지에 묻힌다. 라싸를 거쳐 야르칸드에서 헝가리인의 근원을 찾겠다는 꿈은 영영 이루지 못한다. 야르칸드는 사실 헝가리 민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지만 그곳은 초마의 모든 몽상과 집념과 열정을 모두 하나로 연결해 주는 이상향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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