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토목보 유적 방문 본문
중국사 최대의 굴욕 중 하나인 명대 토목의 변이 일어난 실제 장소 장자커우 토목보(土木堡) 유적에 다녀왔다. 요약하면 명나라 정통제가 탐관오리 환관한테 휘둘려서 몽골 오이라트 부에 포로로 잡힌 레전드 사건... ㅋㅋㅋ...
7월 6일 목요일 당일 딱 3시간 정도만 보고 바로 베이징으로 돌아와서 그날 저녁 친구가 회사 동료들과 함께 모여 법인카드로 사준 베이징 오리를 잡쉈다.
14:13 베이징 칭허 기차역(清河站)에서 출발
17:58 장자커우 화이라이 기차역(怀来站)에서 출발
11~12시 무렵 집에서 나와 기차역에 도착한 다음 직원에게 직접 왕복 표를 샀다. 택시 안에서는 여석이 많았는데 막상 역에 도착하니 실시간으로 매진이 되었다. 외국인이라 여권번호 등을 입력해야 해서 예매 기계로는 사지지가 않았다. 표도 몇 장 남지 않아서 토목보와 근처를 구경할 시간을 좀더 충분하게 두지 못하고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이 샀다. 만약 예매가 가능하면 12306 앱으로 미리 예매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단기 체류 외국인은 여하간 쉽지 않을 것임 ㅋㅋ 근성만 있다면 며칠 전에 미리 기차역에 가서 표를 확보해 두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토목보만 보는 것이 목적이라면 장자커우 역(张家口站)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화이라이 역(怀来站)에 내려서 디디추싱으로 택시불러 타고 가면 매우 편리하다.
高德地图 앱에서 토목보 관련하여 검색하면 나오는 지점은 총 2개가 있다. 그 중에 첫 번째인 土木堡古城北城西墙遗址(토목보 고성 북성 서벽 유적). 화이라이 역에 내려서 디디추싱에 찍고 택시잡아 타고 갔다. 매우 가까운 거리라 금방 갈 수 있으며 도착해 보면 대부분 다 허물어져서 정말 조금만 남아 있다. 이 지점에서는 성벽만 찍은 사진이 없고 설명을 넣은 6분짜리 영상을 찍어놨더라. 걍 귀찮아서 얼굴 시원하게 까고 올리려다가 용량이 크다고 해서 못 올린다. 성벽보다는 내가 주인공인 사진으로 부득이 대체하였다.
지도상에 明代土木之变遗址(명대 토목지변 유적)라고 나오는 두 번째 지점은 이곳이다. 아까 북성 서벽 쪽 동네에서 길건너 오면 금방이고 사진과 같이 문짝을 만들어 놓았다. 문 안으로 들어오면 들판이 있는데 토목보의 변 당시에 바로 여기서 명나라 군대 십수 만명(? 숫자 까먹음)이 몰살당했다고 한다. 거기서 이 동네 사람들이 北山坡라고 부르는 언덕을 올라오면 정통제가 오이라트에 붙잡혀서 포로가 된 그 지점에 정자를 만들어 놓았다. 이건 지도에도 나오지 않고 해당 장소에 따로 안내판이 걸려있지도 않으니 꿀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아까 서벽 쪽에서 산책 중이던 동네 아저씨한테 한국어로 혼자 영상 찍고 있는 것이 딱 걸린 바람에 이야기를 하다가 같이 여기까지 걸어와서 알 수 있었다. 아저씨는 젊은 시절에 도가 수련을 하신 분이고 침술에 능하시다고 한다. 성함을 알려주시면서 나중에 아프면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서 침맞으러 오라고 하셨다 ㅋㅋㅋㅋ 몇 살이냐고 하셔서 33살 정도(맞나? 나이 까묵음) 됐다고 하니까 학생인 줄 알았다고 양생 비결이 뭐냐고 물어보심. 도가 수련자가 양생의 비결을 물어보시다니 영광이었음.
그다음 여기부터는 아저씨가 알려주신 '东门口(동문 입구)' 쪽에서 본 것이다. 东门口는 동네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에 불과하다. 东门口라고 쳐도 지도에 나오지 않고 그 동네 대문에 적혀 있는 土木村民心路를 쳐도 나오지 않는다. 아마 지도에서 찾아가려면 河北省张家口市怀来县京银线이라고 치고 가면 근처일 것 같다. 하여튼 동네 사람들에게는 东门口라고 불리는 지점이니 그렇게 물어서 찾아가면 된다. 나는 가다가 동네 할머니가 끝까지 같이 걸어가 주셔서 같이 갔다. 중국의 시골 어르신들은 매우 여유가 있고 친절하다. 이런 분들이 문화대혁명 때 한창 나이였을 거라는 점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할머니께서 내가 몇 살이게 하고 맞혀 보라고 하셨는데 농촌 생활을 하시면 자외선도 많이 받고 해서 노화가 빠르니까 잘 짐작이 되지 않아 60...? 하니까 78이라고 하셨다 ㅋㅋㅋㅋㅋ 사회생활을 너무 가열차게 한 것 같다 ㅋㅋㅋ 과연 걸음이 좀 느리긴 하셨다. 돌아갈 기차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걸음이 느리셔서 재촉할 수도 없고 이제 와서 혼자 가겠다고 할 수도 없어서 조금 긴장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문제 없이 잘 보고 택시 잡아 타고 갔다 ㅋㅋ 东门口에 도달하면 2002년도 9월에 만들어놓은 동네 입구가 '土木村(토목촌)'이라고 만들어져 있고, 거길 지나가면 옛 성벽 터와 새로 만들어놓은 성벽 터가 같이 보인다. 네모 빤듯하게 생긴 건 당연히 현대에 새로 만들어놓은 가짜 유적이다. 옆에 흙더미처럼 생긴 못생긴 성벽이 옛날 터다.
이 중에 마지막 사진은 东门口로 걸어가는 길에 본 것이라서 东门口 정확한 지점은 아니지만 옛날 토목보가 조금 남아있어서 찍어보았다.
우리는 중국 대표 유적지로 만리장성을 쉽게 떠올리는데 이 장성은 더 이전부터도 있긴 했지만 몽골에게 워낙 많이 털려서 쇄국주의적인 국방 정책을 견지했던 명나라 시대에 많이 확장하고 개보수한 것이다. 또 우리가 베이징 여행가서 본 바다링 장성이나 쓰마타이 장성은 장성의 매우 일부분에 불과하다. 실제로 장성은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 서역의 입구인 둔황 근처에 있는 자위관(嘉峪关长城)에 이를 정도로 중국 북방에 매우 넓게 분포해 있으며 이 분포지는 북방 민족과의 경계에 해당한다. 장성뿐만 아니라 중국 화베이(华北) 지방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한 수많은 요새 도시들이 건설되었고 현재까지도 잔존하며 토목보도 그런 수많은 요새 중의 하나이다. 장성은 중국의 자랑이자 영광이라기보다는 몽골에 너무 유린당하여 앞뒤의 원나라나 청나라와 달리 정복과 영토 개척을 별로 할 수 없었던 노잼왕조 명나라의 고뇌와 굴욕이 담긴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이 시기에 명나라가 몽골에게 시달리지 않아서 장성 쌓는 데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고 해금령도 내리지 않은 채 영토 개척을 하고 대외 무역을 하고 해상 진출을 했더라면? 그러면 당시 유럽이 해양 팽창을 통한 신대륙 개척 중이었지만 산업혁명 이전이었으며 명 역시 영락제 시대에 대함대를 건조하여 동남아와 인도양,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보낼 수 있었던 당대 최강대국이었음을 고려했을 때 세계사의 향방이 꽤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토목의 변 당시 우겸(于谦)이라는 관료가 자기 목숨을 내놓고 사직을 보전한 이야기는 별도로 써볼 예정이다. 2017년 베이징 시내의 우겸 사당에 갔을 때의 사진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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