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토목의 변 본문

중점추진사업/내륙아시아

토목의 변

bravebird 2023. 8. 4. 21:59

명나라 6대 황제 영종 주기진은 연호가 '정통'과 '천순' 두 개다. 즉 두 번 즉위한 셈이고 그 이유는 토목의 변이다.

 

정통제는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며 9세에 황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황제가 어리면 외척이 발호하거나 환관이 날뛰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태감 왕진은 권모술수에 능했다. 때때로 황제를 대신해 대신들이 올린 문서를 결재했다. 반면 태황태후는 현명하여 황제가 처리하는 일을 조정 중신과 상의하게 했으며, 환관 기구를 감찰하고 문제가 있으면 왕진을 소환하여 꾸짖었다. 하지만 정통 7년에 태황태후가 병으로 서거한 후, 정통 11년에 이르기까지 고명대신 역시 연이어 사망하면서 왕진이 정통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한다.

 

당시 몽골은 오이라트와 타타르로 분열되어 있다가 정통제 시기에 오이라트가 강대해지면서 수시로 남하하여 명나라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특히 오이라트 군주 에센 타이시는 말을 조공으로 바친 대가로 명나라에 많은 귀중품들을 요구했으며, 이것은 명나라의 재정에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에센은 명나라를 공격하여 북경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왕진은 정통제에게 황제가 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설에 따르면 왕진이 황제의 친정을 고집한 이유는 황제가 인근 산시(山西)성에 있는 왕진의 고향을 방문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결국 정통제는 이복동생 주기옥에게 황궁 수비를 맡기고 문무백관 100여 명과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다. 군사에 문외한인 왕진이 병권을 쥐었다.

 

보기만 해도 열받게 생긴 왕진

 

에센은 정통제가 친정을 나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단 대동(大同)을 비워둔 다음 북쪽으로 후퇴하여 명군을 몽골 진영의 깊숙한 곳으로 유인했다. 정통제와 왕진은 에센이 겁을 먹고 도망간 줄 알았으나 대동에 입성해 보니 며칠 전 선봉 부대가 몽골군에 참패를 당한 터였다. 왕진은 황급히 후퇴를 결정하고 토목보로 패주하였으나 이곳에서 몽골군에 포위당했다. 토목보에는 우물이 없었기 때문에 물을 구하기 위해 토목보를 나왔다가 몽골군에게 공격당한다. 이때 20만 대군 중 7만 명이 살해당하고 10만 여명이 부상을 입는 참패를 당했다. 장군 번충은 분노에 차 왕진을 죽였고, 번충은 정통제를 호위하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곳에서 정통제는 오이라트의 포로로 잡힌다. 이것을 중국 한족 역사 최대의 치욕 중 하나인 '토목의 변'이라 한다. 그런데 그것치고는 중국인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중국인 여러 사람에게 장자커우에 토목보 보러 간다고 했는데 토목보 사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걸 아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전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중국에서 역사를 배워본 게 아니라 잘 모르긴 몰라도, 한족 왕조가 몽골에게 유린당한 이 이야기는 중화대가정 운운하면서 몽골 역사도 다 자기 거라고 우기는 현재 기준으로는 공식 교육과정에서 별로 강조하지 않을 내용인 듯 하다.

 

 

천자의 자리는 하루도 비워둘 수가 없으므로 북경의 조정에서는 주기옥을 임시 천자로 추대한다. 당시 정통제의 큰아들 주견심(훗날 제8대 헌종 성화제로 즉위)은 3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주기옥은 처음에는 고사하였으나 대신들의 간청을 이기지 못해 정통 14년 황제로 등극한다. 이듬해에는 연호를 경태로 정하고 정통제를 태상황으로 추대한다.

 

에센은 정통제를 앞세우고 북경으로 진격한다. 이에 일부 대신들은 남경 천도를 주장했지만 병부상서 우겸은 수도 보위를 위해 결사항전하기로 한다. 먼저 경기 지방의 병력을 모두 북경으로 집결시키고, 통주로부터 양식을 운반하여 군량미를 확보한다. 대종 경태제는 전권을 우겸에게 위임하고 몽골에 맞서 싸우게 하였으며, 우겸의 지휘 하에 명군은 화포 공격을 가하여 에센의 군대가 포위를 풀고 퇴각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에센은 북경에서 참패한 후 몽골 초원으로 돌아갈 때 정통제를 데리고 간다. 에센은 이용가치가 대단한(말 그대로 king's ransom) 정통제를 죽이지 않고 동생 바얀테무르에게 보내어 극진히 대접했다. 바얀테무르는 포로가 아닌 명나라 황제로서 그를 예우하였으며 두 사람은 친분도 매우 깊었다고 한다. 나중에 정통제가 북경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바얀테무르가 에센에게 석방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에센 타이시

 

에센은 정통제를 인질로 삼아 명나라를 회유하거나 협박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새 황제를 세운 명나라 조정은 에센이 석방 조건으로 내건 과도한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결국 정통제가 포로가 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오이라트는 아무런 이익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에센은 차라리 정통제를 돌려보내 화친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 된다고 판단한다.

 

경태제는 정통제가 돌아오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우겸은 태상황이 환궁하더라도 다시는 천자가 될 수 없다고 황제를 안심시켰다. 또한 태상황을 몽골의 포로로 계속 두는 것 역시 명나라의 치욕이라며 태상황을 맞아들이도록 한다. 경태제는 이에 따른다.

 

우겸

 

정통제는 환궁 후 남궁에서 7년간 구금된 채 지냈다. 경태제는 정통제의 적장자이자 태자였던 주견심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주견제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주견제는 1년만에 요절하면서 태자의 자리는 공석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던 중 경태 8년 경태제가 갑자기 중병에 걸리면서 일부 세력이 정통제의 복벽을 모의하여 성공시킨다. 이를 탈문지변 또는 남궁복벽이라고 부른다. 이후 정통제는 연호를 '천순'으로 고치고 아들 주견심을 다시 태자로 세웠다. 그는 복위 당일 병부상서 우겸과 이부상서 왕문을 체포한다.

 

우겸이 애초에 주기옥을 추대한 것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촉즉발의 위기상황 아래서 수도 북경을 보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태자 또한 너무 어려 황위 계승 서열상 주기옥이 적절한 상황이었다. 에센이 정통제를 포로로 붙잡아 명나라 조정을 협박했음에도 뜻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우겸이 오직 국익을 위해 굳건한 태도로 에센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우겸의 이러한 대공무사한 결단 덕분에 명나라 사직을 보전할 수 있었음을 정통제 역시 알고 있었다. 정통제는 우겸을 죽이는 것을 망설였으나, 복벽을 추진한 세력은 우겸을 죽이지 않으면 본인들이 일으킨 거사에 명분이 없다고 아뢰었다. 결국 우겸은 역모죄로 참수형을 당했다. 우겸은 사형 당시 집을 탈탈 털어보아도 별달리 나온 게 없을 만큼 일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다. 우겸 처형 후 몽골은 다시 명나라의 변방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정통제는 명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우겸의 죽음을 나중에야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현대 중국에서도 우겸은 살신성인의 아이콘이자 국난 극복의 영웅으로 꼽힌다.

 

현재 베이징 시내에는 우겸의 사당이 마련되어 있다. 천안문광장 및 자금성에서 매우 가까운 동단(东单) 역 바로 근처에 있으며 2017년 9월에 방문했었고 토목보 유적은 올해 7월 방문했다. 우겸은 저장성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항저우 시내에 우겸 고거가 검색된다. 아래 사진은 베이징 우겸 사당에서 찍은 것이다.

 

1이 바로 우겸 사당(于谦祠)으로 정말 베이징 정중앙 노른자 땅에 있다

 

토목의 변 이후 명 통치자들은 초원으로 진공하는 원정을 포기한다. 명나라 초기였던 영락제 시기에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면서까지 몽골 원정을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명은 주로 수세에 처해 몽골의 공격을 막아내는 처지가 되었다. 장성에 대해 연구한 아서 월드런(Arthur Waldron)은 명의 전략사를 세 시기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1368~1449(토목보의 변) 시기로 주요 성벽을 건설하지 않아 변경이 개방된 기간이다. 두 번째는 1449~1540년으로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한 기간인데 이때 주요 성벽에 기반을 둔 방어가 시작된다. 세 번째는 1540년에서 명조 멸망까지로, 거대 요새에 주둔군을 집중시키면서 장성 구축을 완성한 시기이다. 즉 장성은 현재 우주에서 보이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의 상징과도 같은 세계문화유산이나, 알고 보면 흉노나 몽골 같은 북방 민족에게 골머리를 썩은 나머지 벽을 치고 나라를 닫아걸었던 중국의 오랜 고뇌가 집약된 흔적이다. 또한 한족의 중원과 북방 민족의 생활권을 나누는 경계선이라는 점에서 중화대가정을 주장하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 사상과도 다소 배치되는 면이 있다는 점은 꽤 아이러니하다.

 

 

참고자료 : 《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 《중국의 서진 - 청의 중앙유라시아 정복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