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배관공과 정치가 본문
회사 조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직무가 있다. 하나는 배관공이고 하나는 정치가이다.
배관공은 피부에 와닿는 실질적인 유지보수와 문제해결 업무를 담당한다. 나는 일에 있어서는 확실히 배관공 성향에 가까우며, 실제로 이런 일이 재미도 있고 가치도 크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내게 실질적으로 주어지는 자율성도 더 높다. 즉 말 안 통하는 경영진하고 씨름하거나 보고서를 무한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 적어서 일만 끝나면 집에 가서 내 생활을 한껏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배관공에게는 고질적인 비애가 있다. 일을 잘할수록 도리어 할 일이 없어지고, 잘해낸 티조차 나지 않아 존재감이 지워진다는 점이다. 문제가 없는 평온한 상태가 기본값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사고가 터지지 않게 하는 것 자체가 역량과 노력의 산물이지만, 사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궂은일이라며 하대한다. 결국 배관공은 주목은커녕 응분의 존중도 받기 어렵고, 문제가 생겼을 때만 비난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반면 정치가는 비전이나 전략 보고서 또는 장표를 만들어 경영진에게 올리는 일을 한다. 좋게 말하면 사업의 방향성을 설계하는 일인데, 실질적으로는 경영진이 툭툭 던지는 파편적인 생각들을 구체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단 며칠 만에 밤을 새워 문서를 찍어내는 그런 일이다. 즉 책임지지 않을 '말의 성찬'을 관장하며, 그런 의미에서 주술사나 제사장과 공통점이 많다.
솔직히 나는 정치가 업무가 하품 나고 역겹다. 각 부서의 데이터를 취합해 보고서 버전을 관리하는 것이 주 업무이며, 경영진과의 씨름 끝에 새벽까지 단어를 골라가며 만든 보고서는 실제 현장의 작동 방식과 괴리가 크다. 전략을 짜봤자 예산이나 실행 권한이 직접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기적이 일어나 전략대로 실행된다 한들 그 결과가 내 피부에 1cm도 와닿지 않는다. 무엇보다 경영진의 입맛에 맞춘 전략이 회사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어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다. 소설은 재미라도 있지, 보고서는 재미조차 없다.

나뿐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 역시 실은 배관공 일을 더 즐기리라 생각한다. 매일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오는 즉자적인 손맛 혹은 조작감이 진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관공으로 일하면 시다바리 취급을 받으며 괄시당하기 일쑤고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한다. 반면 정치가 일을 하면 승진 평가권을 쥔 경영진과 밀착해서 일한다. 요구되는 정량 스펙도 높고 경영진 노출도도 높으니, 일의 실질이야 어떻든 엘리트 코스이자 승진의 지름길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이 그런 업무를 탐내고 배관공을 무시한다.
나는 사실 정치가 업무에 필요한 하드 스킬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일을 그냥 혼자 해도 되면 현직 정치가들보다 더 잘할 자신도 있다. 다만 그 일에 단 1g의 관심도 없어서 도무지 마음이 먹어지지 않을 뿐이다. 이 일은 경영진 입맛에 맞게 곡학아세하는 것이 본질이라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혼자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정치가 내지 제사장 일에는 그 어떤 열정도 궁금함도 생기지 않는다. 첫 직장에서 배관공 업무를 4년 반 동안 하다가 마지막 1년을 정치가로 지내보았지만, 결국 견디지 못하고 이직을 선택했었다.
내 이력으로 정치가 타입의 직무에 지원한다면 환영받을 것이고 직급 레벨도 올라가겠지만 동태눈이 되어 삶의 질이 파괴될 것을 알기 때문에 하기 싫다. 그렇다고 다시 배관공 직무를 선택하자니 그간 겪은 하대가 몸서리쳐진다. 난 언제든 삶 전반의 만족도는 높았지만, 직업 영역에서만큼은 도무지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이 쭉 없었다. 대체 무엇을 해 먹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오직 생계를 위해 싫은 일을 꾹 참고 버텨야 하는 이 시절이 끝났으면 한다. 그저 이름 석 자로,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한 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란다. 로또 당첨만을, 주식 대박만을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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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I: 과학인가 종교인가
난 각종 도구를 사용해서 계량화한 지표를 업무상 다룬다. 예컨대 일일 활성 사용자 수(DAU)라든지, 리텐션이라든지, 각종 매출 효율과 관련된 KPI 지표 관리가 업무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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