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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점추진사업/내륙아시아

실크로드 탐험가 트리비아 (2)

bravebird 2017. 8. 6. 00:54

아우구스투스 프레데릭 루돌프 회른레: 1821년 인도에서 태어남. 독일계 성공회 선교사의 아들. 런던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웠고, 당시 영국령 인도의 수도였던 캘커타에서 학문 연구. 인도 고문서 해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영국 편에서 고문서 수집 경쟁에 참여했다. 희대의 고문서 위조범인 이슬람 아훈에게 깜빡 속는 바람에 뻘논문까지 쓰게 되지만, 동료 학자들이 슬쩍 넘어가줌. 개이득~ (오렐 스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클릭)

바우어 고사본 일부. 위키피디아 펌. (이미지 클릭)


바우어: 인도 육군 정보부 장교. 스코틀랜드 탐험가인 앤드루 댈글라이쉬(Andrew Dalgleish)를 청부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수색하던 중, 굴람 카디르라는 현지인으로부터 51매의 자작나무 껍질로 된 문서를 사서 캘커타에 있는 벵골 아시아 협회에 보냈다. 이게 바로 바우어 고사본(Bower Manuscript). 이 고사본은 5세기경 인도 승려가 브라흐미 문자로 집필한 산스크리트 텍스트. 현존하는 문서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 브라흐미 문자는 그때까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었는데 회른레가 해독해냄. 이 고사본의 발견을 계기로 중앙아시아 유물 획득 경쟁에 붙이 붙음.   

조지 매카트니: 카쉬가르 주재 영국 영사. 중국 어머니와 스코틀랜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유라시안. 루돌프 회른레를 도와 고문서 수집에 열중.

이슬람 아훈: 희대의 고문서 사기꾼. 매카트니와 회른레를 실컷 골탕먹였다. 아예 공장을 차려서 고문서를 위조해갖고 모래까지 알뜰히 입혀다가 팔아먹음. 수요가 느니 수법도 대담해져서 그냥 아무 글자나 휘갈기고 종이는 그을려서 위서를 제조해 냄. 이슬람 아훈이 매카트니한테 팔아넘긴 문서는 회른레에게 전달됨. 회른레는 이 위조 문서를 가지고 학술 논문을 쓰는 지경에 이름. 이렇게 서양 엘리트 학자들을 꿀먹은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고 세상의 이목을 중앙아시아로 집중시켜 탐사 경쟁에 불을 질러버린 능력자. 후에 오렐 스타인한테 들통이 났지만 스타인마저도 그 수완과 달변에 경탄했을 정도. 

니콜라이 페트로프스키: 카쉬가르 주재 러시아 영사. 매카트니의 경쟁자. 첩보전에 능하고 계략이 뛰어나 중국령 투르키스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 유물 수집에도 수완이 뛰어나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파리의 박물관에 부지런히 골동품을 조달했다.

이브라힘 물라: 페트로프스키에게 가짜 문서를 팔아넘긴 사기꾼. 이슬람 아훈의 동업자. 이브라힘도 직접 문서를 날조했는데, 어설픈 러시아어 흔적을 남겼다. 러시아 키릴 문자가 희랍 알파벳에 바탕을 두고 있는 까닭에, 고대 그리스 관련 문서일 거라는 희망 고문을 선사했다고 함. 

오렐 스타인: 부다페스트 태생 유대인. 빈과 라이프치히에서 동양 언어를 공부하고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 취득. 이후 옥스퍼드에서 고고학과 동양 언어를 공부함. 어린 시절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을 동경함. 영국령 인도의 라호르(현 파키스탄 영토)에서 교사로 생활하면서 라호르 박물관 관장 키플링과 친교를 맺음. 이 키플링이 바로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킴》의 작가 러디야드 키플링의 부친이다. 인도 총독이었던 커즌 경이 라호르를 방문했을 때 스타인이 박물관 안내를 맡으면서 눈에 들게 됨. 이때 스타인은 카라코람 산맥 건너편을 탐사하려는 계획을 전달하고, 이를 마음에 들어한 커즌이 탐사를 후원함. 회른레도 스타인의 탐험을 지지함. 단단윌릭과 니야를 탐사해서 엄청난 고고학적 성과를 올림. 이후 둔황 장경동에서 왕원록 도사를 구워삶아 현재 영국도서관의 보물인 금강경 등 노다지를 캐냄. 그 6개월 후 프랑스 문헌학자 폴 펠리오도 이곳에서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한 엄청난 고문서를 헐값에 얻음.

오타니 고즈이: 1902년 타림 분지를 탐험. 일본 교토에서 온 정토진종의 지주. 오타니 컬렉션의 일부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관에도 전시되어 있음. 1908년에는 타치바나 즈이초노무라 에이자부로를 보내서 탐험하게 함. 1910년 타치바나 즈이초는 홉스라는 영국인과 함께 또다시 실크로드를 탐사. 홉스는 이 여행에서 사망했으며 그 장례식에 타치바나가 참석함. 일본은 1905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만주 이서 지역을 슬슬 넘보고 있었는데, 러시아와 영국은 중앙아시아 쟁탈은 자기네 두 나라에 한정돼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고고 탐사를 경계하는 입장이었음. 매카트니는 이 장례식에서 타치바나와 대화를 해보고는 단순 고고학 여행객으로 결론을 내리고 경계 수준을 낮췄지만, 타치바나가 둔황으로 갈 때까지 계속 미행을 붙여 오렐 스타인을 배려해 줌. 

드미트리 클레멘츠: 러시아 학자. 투르판 지역을 탐사하고 130여 개의 불교 동굴 사원을 발굴하고 독일어로 보고서를 출간했으며 벽화 몇 점을 러시아로 가져감. 

알베르트 그륀베델: 베를린 민속학 박물관의 인도 부서 부장. 1902년에 게오르그 후트(Georg Huth)테오도르 바르투스(Theodor Bartus)와 함께 제1차 중앙아시아 탐험길에 올라 투르판을 탐사. 드미트리 클레멘츠의 보고서에 영향을 받음. 제2차 탐험은 후트 박사의 죽음과 그륀베델의 건강 악화로 인해 알베르트 폰 르콕이 이끌게 됨. 

알베르트 폰 르콕: 위그노 교도이자 부유한 포도주 판매상의 아들. 포도주 사업을 하다가 40대가 되어서야 베를린에서 동양 언어를 공부하기로 결정. 1902년에 베를린 민속학 박물관에서 무보수 견습생으로 일을 시작함. 그 후 불과 2년 만인 1904년에 2차 탐험의 대장을 맡아 바르투스와 함께 투르판 탐사. 그륀베델은 프레스코를 벽에서 떼어내는 것을 꺼렸지만 르콕과 바르투스는 아무렇지 않게 쓱쓱 썰어서 가져가 버림. 마니교 관련 벽화를 발굴한 것이 주요한 성과. 베제클릭 석굴에서도 엄청난 양의 벽화를 뜯어냄. 투르판 동쪽에 있는 하미에서 일생일대의 갈림길에 섬. 하미에서 둔황 장경동에 대한 소문을 들었지만, 때마침 그륀베델이 카쉬가르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동전던지기 끝에 둔황을 포기하고 카쉬가르로 가게 됨. 도착해 보니 그륀베델은 오는 길에 짐을 잃어버려 무려 52일 후에나 도착을 했고 설상가상으로 지치고 병이 들어 있었음. 르콕은 그륀베델 때문에 둔황 탐사 기회를 뺏겨 버려서 엄청나게 화가 나고, 둘 사이에는 불화가 생김. 

2015년 8월 베를린 달렘 미술관에서 찍어온 마니교 관련 벽화 1 (폰 르콕 컬렉션) - 투르판 고창 고성에서 발굴

2015년 8월 베를린 달렘 미술관에서 찍어온 마니교 관련 벽화 2 (폰 르콕 컬렉션) - 투르판 고창 고성에서 발굴


베레조프스키 형제: 쿠차를 탐사한 러시아인들. 르콕은 이들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그륀베델이 다 낫지 않았는데도 쿠차로 탐사를 떠나 먼저 도착함. 베레조프스키 형제들은 이들 숙소에 들이닥쳐 독일한테 할당된 구역으로 당장 꺼지라고 위협. 그 근거는 그륀베델이 1차 탐사를 떠나기 전에 자신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맺은 협정. 이 협정에 따르면 투르판은 독일이, 쿠차는 러시아가 맡기로 되어 있었다. 근데 먼저 약속을 깬 게 바로 러시아로, 르콕이 투르판에 도착하기 전에 러시아 영사 대리가 이미 투르판에서 꽤 많은 유물을 몰래 가져가 버림. 르콕은 여기 화가 나서 이 협정의 무효를 선포하고 쿠차를 발굴하자고 그륀베델을 설득한 것. 쿠차에 뒤늦게 당도한 베레조프스키 형제가 무기까지 갖다대며 위협하자 르콕은 그냥 쿠차를 내주기로 결정. 르콕은 내심 이 러시아인들을 대단한 경쟁자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쿠차를 떠났다고는 하는데 그 직전의 일인지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쿠차 키질 석굴에서 벽화를 잔뜩 뜯어다가 베를린으로 갖고 갔다. 라피스 라줄리의 신비한 푸른색이 두드러지는 굉장한 벽화들이 2차대전의 포화 속에서 수없이 훼손됐지만, 지금까지도 베를린에 많이 남아있음.  

랭던 워너: 실크로드 유물발굴 레이스에서 유일한 실패자. 미국 하버드에서 수학한 동양미술사학자. 중국 내에서 군벌이 난립하고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된 시기에 탐험에 나섬. 하버드 대학 포그 미술관의 재정 지원을 받아 호레이스 웨인(Horace Wayne)과 동행함. 고비 사막 한가운데 흑수성으로 알려진 카라 호토가 첫 번째 목표. 이곳은 러시아 출신의 표트르 코즐로프가, 그 다음으로는 오렐 스타인이 이미 한번씩 싹쓸어간 곳이라 남아있는 게 없었음. 설상가상으로 돌아가는 길에 웨인은 동상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함. 워너는 웨인을 베이징으로 보내고 나서 혼자 둔황에 도착해서 막고굴을 구경함. 막고굴을 지키는 왕원록 도사를 설득해서 이미 훼손된 벽화들을 조금 뜯어내고, 보살상 하나를 구입해서 포그 미술관으로 가져감. 2차 탐험은 중국 국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아예 좌초.


이 내용은 C. 리히터, B. 바우만, B. 리프너가 지은 《실크로드 견문록》에서 발췌해서 정리했다. 나중에 살을 붙여서 재밌게 써보는 것이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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