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청조 만몽합작의 아이콘, 효장태후 본문
홍타이지의 부인이자 순치제의 어머니, 강희제의 할머니인 효장태후(孝庄太后)는 중국사상 대표적인 여성 정치가이다. 지혜와 강단을 겸비한 여걸로, 자신이 직접 권력을 휘두르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황제 셋을 성실히 보필하여 신생 청조의 기틀을 다졌다. 본명은 보얼지지터 부무부타이(博尔济吉特·布木布泰)로 호르친 몽골 부족(科尔沁部) 태생이다. 호르친 부는 청조 초기부터 결혼 동맹을 통해 아이신 기오로 가문에 적극 협력했으며 북방 수비 역할을 담당했다.
효장태후(孝庄太后)
내몽골 자치구 초원 분포 - 호르친 초원의 위치
17세기 초 명말 시기의 후금과 호르친 부 위치. 오른쪽 아래 지도는 명 초기의 여진족 각부 분포.
헤이룽장강 근처 가장 추운 지역이 야인여진, 그 아래가 해서여진, 그 아래가 건주여진으로, 청조의 전신이 건주여진.
호르친 부와 청조의 결혼 동맹이 어느 정도였냐면, 홍타이지만 해도 보얼지지터 가문에서 최소 3명을 아내로 데려왔다. 부무부타이뿐 아니라 고모 저저(哲哲)와 친언니 하이란주(海兰珠)도 같은 지아비를 섬겼다. 이 중 황후는 저저였는데 저저는 아들을 낳지 못해 사실 허울만 좋은 황후였다. 부무부타이는 아들 푸린(福临)을 낳았다. 홍타이지는 하이란주를 총애했다. 질투로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었을 텐데 셋은 화목한 사이를 유지했다. 저저는 특히 부무부타이를 크게 아꼈다. 모두가 정략결혼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부족과 가문의 이익을 생각해서 대승적으로 처신했다.
홍타이지가 죽었을 때는 황위 계승자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다. 만주족은 한족처럼 장자 세습하지 않는다. 특히 당시는 특히 버일러, 황족, 대신 등이 협의하여 후계자를 옹립하는 체제였다. 당시 푸린은 나이가 아주 어렸고 경쟁자도 쟁쟁했다. 첫 번째 경쟁자는 이복형이자 황장자인 후거(豪格)였다. 두 번째 경쟁자는 숙부 도르곤(多尔衮)이었다. 둘다 지략과 무용을 겸비한 인재들이었다. 후거는 팔기 중 정람기 기주였는데 주로 황기와 홍기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도르곤은 정백기 기주이고 동생은 양백기 기주여서 백기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둘 다 황기의 대신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정황기와 양황기는 황제 직속으로 팔기 중에 가장 지위가 높고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당시는 홍타이지의 사망으로 황후 저저가 황기의 상속인이었으며, 같은 가문의 부무부타이와 그 아들 푸린도 황기 세력으로 분류됐다. 황후 저저와 황비 부무부타이는 황기 대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이신 기오로 도르곤 (누르하치의 아들)
만약 도르곤이 황제가 되면 자기 세력인 백기를 황기로, 기존의 황기를 백기로 교체할 게 뻔했다. 이것은 기존 황기로서는 강등을 의미했기에 백기에 맞서 협력해야 했다. 그런데 황기는 응집력이 아주 강하지는 않아서, 처음에는 도르곤 파와 후거 파, 푸린 파가 공존했다. 푸린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처음에는 후거 쪽이 우세했지만 도르곤과 백기 쪽에서 반대가 심했다. 게다가 후거도 정람기 기주이기 때문에 제위에 오르면 황기의 지위를 위협할 것이었다. 결국 황기는 황후와 황비 부무부타이가 지지하는 푸린을 지지하여 황기를 사수하기로 중지를 모았다. 후거는 황제 옹립 회의에서 황기의 여론이 이미 푸린 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알고 물러났다. 도르곤은 후거가 양보했으니 푸린이 황위에 오르는 대신, 아직 어리므로 자신과 지르갈랑(济尔哈朗)이 섭정을 하다가 성년이 되면 친정을 시행하는 절충안을 제안했다. 이에 푸린이 즉위한다.
청 제3대 황제 순치제 (아이신 기오로 푸린)
순치제 즉위 초기, 두 섭정왕이 황제를 보필하는 동시에 양 황기 대신들이 정국을 좌우하며 효장태후의 의도를 관철하려고 노력했다. 효장태후의 참모 범문정(范文程)과 홍승주(洪承畴)는 조정에서 태후의 의도를 건의했다. 효장태후는 탁월한 식견과 수완을 갖고 조정 국사를 논하는 중요 인물이었기 때문에 세력이 대단한 도르곤도 태후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도리어 상주문을 올려 의견을 묻기도 했다. 효장태후는 이처럼 도르곤의 독주를 견제하며 순치제를 보좌했다.
한편 도르곤은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을 차지하는 커다란 공적(1644년 청군 입관)을 세웠다. 도르곤은 대권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않고 심지어 용포를 준비해 놓고 살다가, 사냥 중 넘어져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급사했다. 도르곤 사후에 순치제가 도르곤의 정백기를 직접 관할하면서 정백기와 양 황기가 황제 직속의 3기(上三旗)가 되었다. 이에 도르곤 세력이던 백기와 황제 직속의 황기 간 대립구도가 와해됐다. 각 기주와 황제가 대권을 두고 각축을 벌이는 구도가 완전 소멸하고, 팔기가 공히 황제를 수호하고 황제 본가 내에서 황위가 세습되는 중앙집권제가 확립됐다. 이것이 청군 입관과 함께 순치제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이 모든 과정에 효장태후의 공이 컸다. 효장태후는 어린 순치제를 보필하여 도르곤을 적절히 활용하면서도 견제했으며, 도르곤 사후에는 죄상을 밝혀 팔기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방향타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순치제가 천연두로 사망한 뒤에도 평소에 직접 눈여겨보고 교육하였던 손자 쉬안예(玄烨)를 옹립함으로써 청조 초기의 중앙집권 기틀을 확실히 했다.
청 제4대 황제 강희제 (아이신 기오로 쉬안예)
이 쉬안예가 바로 중국사 최고의 명군 강희제이다. 효장은 강희제 즉위 이후에도 정치적인 참모 및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강희제가 아직 어려서 오보이(鳌拜)를 포함한 4명의 보정대신이 황제를 보필하던 시절에는 효장태황태후와 4인의 보정대신이 집단으로 황제의 통치 지도를 맡았다. 이후 오보이가 황기와 백기 간의 해묵은 토지 구획 문제를 끄집어내면서 자신이 속한 양황기 앞으로 토지 권점을 강행하고 전횡을 휘두르자 강희제가 수완을 발휘하여 오보이를 잡아들이고 친정 체제로 전환했다.
무란위장 - 이번에 청더 갔지만 여긴 못 감. 나중에 여름에 칼간(장자커우)이랑 내몽골이랑 같이 가봐야지.
강희제는 청의 강역을 크게 넓힌 유능한 정복 군주였다. 현재의 허베이 성 청더에 해당하는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황실 사냥터 무란위장(木兰围场)을 만들고 목란추선(木兰秋狝, 가을사냥)을 열어 몽골의 왕공을 만나고 연회를 베풀었다. 열하와 무란위장은 몽골 초원 지대에서 멀지 않은데 기후가 서늘해서 천연두 바이러스가 창궐할 위험이 낮았다.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몽골 왕공을 위해 이곳에서 황제를 알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강희제는 또한 출가 이후 친정에 방문한 적이 없는 효장태황태후가 이곳에서 친정 가족들의 후손을 접견할 수 있도록 했다. 효장태후는 친정 호르친 부를 통해 내몽골 부족을 단결시켜 북방 변경을 안정시켰으며, 이는 강희제가 준가르부 정벌 등 대외 정복 사업을 벌일 때 든든한 밑바탕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 청 초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황제를 굳게 보좌했다. 그야말로 청조 만몽합작의 아이콘이었다. 강희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진시황은 토목공사로 만리장성을 쌓아 북방을 방어하려 했다. 반면 대청은 몽골에 은혜를 베풀어 북방 방어를 맡겼다. 이는 만리장성보다 훨씬 견고하다."
※ 이 내용은 멍자오신 저 《청나라를 일으킨 몽골 여인 - 효장》을 읽고 정리했습니다. 국내에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관련 책은 흔한데 그 이전의 후금~청 초기 통치자에 대한 별도의 단행본은 별로 없습니다. 요 몇년 새 그나마 《누르하치》는 나와서 지금 읽고 있고요. 특히 도르곤과 효장태후는 명말 청초를 다루는 그 어디서나 항상 언급되는 최중요 인물이고 인기 드라마도 넘쳐났지만 국내출간 단행본은 딱히 없었는데요. 이 책 보시면 홍타이지, 순치제, 도르곤, 효장태후 관련해서 정리가 꽤 잘 돼있습니다. 즐겁게 읽을 수 있어요. 참고로 이 책 저자는 효장태후가 도르곤에게 시집 갔다는 일설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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