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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기제와 만주족

bravebird 2017. 10. 14. 23:43

《만주족의 청제국》은 신청사(New Qing History) 분야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청조사 딱 펴면 제일 처음 나오는 개념이 팔기제라 업 들으면 시험에도 지겹게 나왔지만 팔기 기인들 생활이 실제 어땠는지, 만주족 정체성이랑 왜 그렇게 밀접하다고 하는지는 몰라서 한번 읽어봤다. 저자 마크 엘리엇은 청조의 근간이었던 팔기제도(八旗制度)를 분석하여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었다는 한화이론에 도전한다. 또한 대청제국의 중국 지배에 있어 팔기제를 바탕으로 한 만주족 정체성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음을 강조한다. 


신청사 연구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1. 청조 내내 한인과 만주족 간에는 차별성이 유지됐다. 후기로 갈수록 만주족은 문화 변용을 겪기는 했으나 중국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았다. 

2. 민족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는 청조와 같은 복합적인 사회에서 집단 정체성의 역학 관계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집단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다. 만주족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3. 만주어 사료의 활용이 중요하다.


17세기 초에 누르하치가 창설한 팔기는 군사, 사회, 정치, 경제의 기능이 결합된 복합적인 사회 조직이었다. 황제를 제외한 모든 만주족 인구가 팔기 소속이었다. 청조의 건국 과정에 협력한 몽골인과 한인들도 몽고팔기, 한군팔기에 각각 소속되었다. 베이징을 포함한 시안, 난징, 항저우, 징저우(형주), 닝샤, 푸저우, 광저우(광저우에는 성벽은 없었음)지방 여러 곳에 성벽을 짓고 이 성벽 안에 팔기의 거주지를 할당해서 일반 백성과 팔기 소속의 기인(旗人) 인구를 격리시켜 놓았다. 베이징의 기인 거주구역은 경사(京师), 지방의 경우는 주방(驻防)이라고 했다. 현재 베이징 자금성 근처 후통 밀집지역에 3대 이상 대대손손 살아온 라오베이징 사람들은 기인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내가 자주 다니던 종고루, 스차하이 근처는 양황기, 정황기 구역이었구나. 두 황기는 황제 직속이라서 팔기 중 가장 실력있고 위세높았다거기 마실 나오신 어르신들 중에 진짜 라오베이징 분들은 조상들이 한끗발 날리셨을 듯 하다.  


팔기의 종류


베이징 자금성 주변 팔기 분포 - 베이징 제일 노른자 땅(2환!)이 전부 팔기 차지였군. 전부 황성 안쪽이다.



기인들에게는 특정한 생활 방식이 요구되었다. 만주어가 능통해야 했으며 기마술과 궁술을 부지런히 연마했다. 여러 특권도 보유했다. 기인들은 관직에 입문하고자 할 때 한인에 비해 문턱이 낮았으며 처벌을 받는 경우에도 그 처분이 관대했다. 게다가 팔기는 세습 신분이었다. 중앙 정부는 이 팔기 기인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막대한 재정 지출을 감수했다. 기인은 팔기나 국가 관료제 이외의 직역에는 종사할 수 없었으므로 이들을 부양하기 위한 부담은 상당했다. 심지어 기인들은 후기로 갈수록 아무 일도 안 했다. 학자, 농부, 노동자, 상인, 병사, 평민 중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정부가 보장하는 녹봉 덕분에 빚을 내서라도 물건을 살 수 있었다. 팔기는 이처럼 특권적인 신분이었으며 청조 지배층은 만주족의 특권과 차별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푸저우 주방 지도


청조 초기에는 주방팔기 사람이 사망하면 그 시신과 일가족이 경사로 보내졌다. 주방 근무는 다만 임시직일 뿐이고 만주족의 진정한 고향은 경사라는 관념 때문이었다. 이것은 한인 비율이 압도적인 지방에서 만주족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런 조치가 누적되면서 경사와 주방팔기 당사자의 부담이 모두 커지자 이를 폐지하고 유가족들을 그대로 지방에 남겨두게 되었다.  


이처럼 18세기 무렵 기인들이 지방 생활에 익숙해져 문화 변용이 일어나고 청조의 지배가 안정되어 가면서 만주족의 기마술, 궁술, 만주어 실력은 모두 퇴보했다. 만주족과 한인 간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만주족은 한인과 달리 전족을 하지 않고 만주족 전통에 대한 과거 기억에 의존한다는 점 정도였다. 결국 위기를 느낀 옹정제와 건륭제는 여러 차례 조칙을 내려 만주어와 상무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히 18세기에 옹정제는 팔기제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이 시기에는 조상이 팔기임을 입증하는 서류가 없는 사람들이 팔기로 침투해 들어오면서 정부의 재정적 부담이 한층 커졌다. 결국 족보를 조사하고 베이징과 광저우를 제외한 모든 만성에서 한군팔기를 내쫓았다. 이를 계기로 팔기에 소속되어 있다는 그 자체가 만주족의 표지인 것처럼 되어갔다. 기인과 만주족이라는 용어가 융합된 것이다. 이 개혁 조치를 통해 팔기제는 만주족과 몽골족의 특권 보호라는 목적에 봉사하며 더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만주 병사


만주 병사 - 그림 너무 심각하게 멋진데 누가 그렸는지 모르겠다. 카스틸리오네 그림이라는 은 있으나 출처가 확실치 않다.


엄밀히 말하면 기인이 곧 만주족으로 인식된 반면, 만주족이 곧 기인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즉 필요할 때는 여전히 팔기 내 민족을 세밀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팔기는 만주족의 제도였고, 기인은 겉으로는 법적 지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만주족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황실이 팔기를 고려할 때는 관심의 초점이 만주족 기인에 맞춰졌으므로 기인이 곧 만주족인 것처럼 용어 사용이 확산된 것이다. 팔기 밖에 있는 일반 한인들의 관점에서는 기인의 특권이 여전히 '만주족'의 특권처럼 보였다. 팔기 내의 기인 입장에서도 만주족, 몽골족, 한인 기인은 팔기의 특권이 '만주족'의 특권처럼 보였다. 몽골족의 경우에는 한인에 비해 그 특권을 좀더 많이 나눠받았다. 


19세기 무렵에는 이미 만주의 전통적 생활 방식은 흐릿해졌다. 그렇지만 팔기라는 만주식 제도가 유지되는 가운데 기인과 만주족 범주가 융합되었기 때문에 만주족 정체성도 청조 내내 존속했다. 한어를 쓰고 한시를 짓고 한인 첩을 두고 살더라도 팔기에 소속된 모든 사람은 만주족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1950년대 민족식별 당시, 팔기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하면 만주족(满族)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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