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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의 내치 (올해 수능 예언 포함)

bravebird 2017. 11. 20. 23:03



한무제 때 동중서의 활약으로 유교가 관학으로 확립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유가사상은 군주제도를 정당화하면서도 진나라 때의 가차없는 법가사상보다는 말랑말랑해 보인다. 한 마디로 착한 척 하면서 점수 따기에 딱 좋다. 유비생각나넼ㅋㅋ 이렇게 겉으로는 유교를 내세우면서 야금야금 법가적인 통치를 실시하는 간특한 꼼수를 외유내법이라고 부른다. 한무제 신하 중 급암이라는 자가 그 꼼수를 꿰뚫는 사이다 발언을 했다. "속마음에는 욕심이 많으면서 겉으로는 인의를 행하는 척 하십니다 그려." 


놀라운 것은 무제가 이런 급암을 두고 사직을 지탱하는 신하라며 중용했다는 것이다. 둘다 기개가 있다. 난 중국사를 좋아하지만 전형적인 한족 왕조들은 따분해 하는데, 아직 푸릇푸릇한 신생 제국이었던 한나라의 이런 간특하다거나 유연하다거나 패기롭다거나 한 부분은 후대의 독자에게 커다란 재미를 준다. 조조가 막 회사 동료거나 거래처거나 하면 너무나 싫겠지만 먼 곳 이야기 주인공으로서는 제격인 것처럼 말이다. 아 전 삼국지빠 위촉오빠 그 아무것도 아니고요 그냥 주유 좋아합니다!


한무제는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도 많이 기울였다. 창업주인 한고조 유방 때는 공신들에게 분봉을 해야 하다 보니 주의 봉건제와 진의 군현제를 결합시킨 군국제를 실시했다. 봉건제는 제후왕에게 땅을 떼어주는 방식이고 군현제는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제적인 지방행정 제도다. 봉건제는 땅을 떼어주고 대대로 세습시키다 보니 시간이 흐르고 대가 내려갈수록 중앙과 지방 사이의 끈끈하던 관계가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다. 주나라가 이 지경에서 손을 쓰질 못하고 춘추전국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어느 황제라도 그러하겠지만 한무제는 제후들이 설치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기존의 군국제에서 봉건제적인 요소를 없애기 위해 추은(推恩)을 실시한다. 제후왕이 죽으면 그 영토를 잘게 쪼개서 그 자제들한테 나눠줘버리는 것이다. 이 아들들은 제후는 시켜줬지만 왕으로 봉하진 않았다. 결국 대가 내려갈수록 영토가 과분되면서 황제가 다 갖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는 인의예지를 숭상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흑심이 가득한 외유내법의 간특함을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한무제 외유내법 = 머이런느낌



한무제는 국가 재정 확보에도 힘썼다. 화폐를 주조했고 제철과 제염 사업을 국영화했다. 제염의 경우 제조는 민간이, 판매는 정부가 맡아 민간을 통제하면서 소득세도 쏠쏠히 거둬갔다. 균수법과 평준법도 실시했다. 균수법은 정부가 각 지방 특산품을 적정 시기에 수매해서 타지역으로 운송한 다음에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기는 방식이었다. 평준법은 정부가 전국의 물자를 장악해서 싸게 사들인 다음 비싸게 팔아치우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이윤은 정부 차지였다. 이런 국가주의적인 재정 정책은 기세등등한 흉노를 당해내기 위한 국고를 불려 주었지만 여러 가지 논쟁을 야기했다. 국가만 돈을 벌고 민간은 억제하는 것은 정의로운가? 세금 체납자를 서로 고발하게 하는 것이 옳은가? 세금을 강제하는 것은 지당한가? 이것이 바로 염철논쟁이다.


염철논쟁은 소금, 철, 주류의 국영·전매제도를 한무제 사후에도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찬반 논쟁으로, 전국의 유생들을 불러모은 대토론이자 그 내용이 무려 《염철론》이라는 책으로 기록에 남았다. 어사대부 상홍양은 흉노 토벌과 국경 수비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찬성파(외조)였다. 반면 유학자들은 전쟁을 꺼리는 동시에 국가의 상공업 통제에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반대파(내조)였다. 당시 유가는 한무제의 외유내법 기조 하에서 실질적으로 법가에 밀리는 처지였고 열세를 극복하려 했다. 결국 염철논쟁은 철학적인 논쟁으로 시작해서 피튀기는 정치 투쟁으로 번진다. 문관 대 문리, 유가 대 법가, 왕도 대 패도, 내조 대 외조 구도가 만들어졌다. 


문관은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정치 아젠다를 제시하는 지식인 및 정치가 집단으로 유가적 왕도정치를 지지하는 내조 세력이었다. 문리(文吏)는 재무회계나 법률 등 전문적인 실무 능력을 갖춘 관료 집단으로 법가적 패도정치 성향의 외조 진영에 속했다. 결국에는 곽광 등의 전매제도 반대파(내조)가 승리하면균수법과 평준법 등은 대부분 폐기되며, 이에 반대하여 역모를 꾸민 상홍양 세력은 발각되어 처단당한다. 이 내조와 외조 구도는 한무제 때 생겨난 후 전한 시기의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또 염철논쟁을 계기로 주류 전매제도는 폐지되지 염철 전매는 유지가 됐다. 그 중 소금전매는 무려 2천 7백년의 역사를 거쳐 2017년 올해(!!) 드디어 폐지됐다. (이거, 이거우와 이거 엄청난 떡밥이구나, 당분간 소금전매 기사만 뒤져 안 심심하겠다 만세 ㅋㅋㅋ 이거 올해 수능 동아시아사에 나올 각인데?! 이거 무조건 나온다!! 안나오면 말고 ㅋㅋㅋ


한무제는 그 유명한 실크로드 개척 군주다. 흉노한테 굴욕을 당하고 억지로 화번공주를 바쳐야 했던 한고조 시절과는 달리, 곽거병을 보내서 흉노를 개박살내기도 하고 장건을 보내 서역을 개척하기도 한다. 고조선과 남비엣을 정복한 것도 이때다. 어쩔 수 없이 흉노에 투항해야만 했던 이릉을 옹호하는 게 괘씸하다면서 사마천한테 궁형을 내려 고자로 만들어버린 것도 바로 한무제다. 내가 재밌어 하는 건 정복사, 변경사다 보니 한무제의 대외 활동은 꽤 익숙한 반면 내치 관련은 잘 알려진 내용인데도 접한 적이 의외로 잘 없다. 그냥 동중서 유교 태학 군현제 평균법 준수법 염철전매, 끝. 특히 염철논쟁은 굉장히 중요해 보였는데 별도로 접할 기회는 없었다. 이중톈 중국사 8권 《한무의 제국》에 재밌게 쓰여있는 것을 메모해둔 걸 보고 이제야 글로 써놓는다.  




아래는 이중톈 중국사 8권 한무의 제국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읽으면서 설레었던 부분이다. 아 시안 다시 가보고 싶어졌어. 


무제 시대는 진나라 이전과 시기상 많이 떨어지지 않았고 새로 살림을 시작한 한 제국도 혈기가 넘쳤다. 역사가들의 말처럼 당시의 중국인은 후대보다 훨씬 더 진솔하고 훨씬 더 용감했으며 훨씬 더 질박하고 강직했다. 한나라는 기개가 웅대하고 분방하여 무게감이 있었다.


부드럽고 변화무쌍하면서 내면의 총명함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분위기로 바뀐 것은 中唐(766-835)에 가서다. 유학이 진정한 통치 사상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송·원 이후다. 백가가 쇠퇴하고 모든 사람들이 입을 굳게 다물게 된 것은 주원장과 건륭제가 문자옥을 일으킨 뒤의 일이다.


한나라는 패도의 시대였다.


또한 한나라는 개방적이기도 했다. 장안성 안에는 세계 각국의 상인과 사절들이 넘쳐났고 별궁 근처에도 원산지가 서아시아인 개자리와 포도가 가득 심어져 있었다. 눈이 움푹 들어가고 수염이 무성한 외국인들이 장안 시장에서 가격을 흥정하고 레이디 퍼스트의 풍습을 고수했지만 황제는 이를 흐뭇하게 지켜봤다. 한 무제는 스스로를 좁은 울타리에 가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동중서의 말 때문에 유가에 귀의하고 다른 창문을 닫지도 않았다.


사실 무제는 진짜로 유가에 열중한 것은 아니며 동중서 같은 '순수 유가'보다는 공손홍 같은 '잡식성 유가'와 장탕처럼 유가로 외관을 꾸밀 줄 아는 문리를 좋아했다. 유가와 법가를 뒤섞고 왕도와 패도를 병용한 것이 그의 진면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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