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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중화권

3/20 타이페이 1일차: 대만대학, 여서점, 모스크, 식도락

bravebird 2015. 3. 30. 02:11

타이페이에서 공부 중인 친구가 있어 하루 휴가를 쓰고 주말 동안 놀러 갔다. 원래 작년에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드디어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따뜻한 남쪽나라다 보니 가벼운 옷을 입고 봄기운을 제대로 낼 수 있었다. 3월은 타이완 여행의 적기라더니 딱 그랬다. 반팔 입고 가디건 하나 가지고 다니면 딱 적당한 날씨였다.


캐세이퍼시픽 비행기를 탄 관계로 시내의 송산공항 대신 타오위안 공항에 내렸다. 내려서 3일간 3g 데이터를 무한 제공하는 유심칩을 사서 끼워 넣고 문명세계에 즉시 재접속할 수 있었다. 대만달러 300불이니 우리 돈으로 만 원 정도. 다니는 내내 여행자를 위한 인프라가 무척 잘 되어있고 편리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타오위안 역에서 타이페이 시내로 들어가려면 대만달러 120원을 내고 국광버스(國光客運) 1819번을 타면 된다. 넉넉잡아 1시간 정도 타고 가서 타이페이 메인 스테이션(臺北車站)에 내리면 바로 시내 한가운데다. 


숙소는 한국의 명동에 해당하는 시먼 6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부킹닷컴에서 예약한 트리플 타이거 호스텔이라는 곳인데, 전날 이메일로 약도도 미리 보내주고 직원 분들도 친절하고 길 찾아가기도 쉽고 이래저래 편리하다. 마치 종로3가 1번 출구에서 만나듯 시먼역 6번 출구에서 친구를 만나, 숙소에 짐을 풀고 바로 훠궈집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무한리필 훠궈집으로, 馬辣(頂級麻辣鴛鴦火鍋)라는 이름이다. 청탕과 홍탕 둘로 나뉘어 있는 원앙마라훠궈를 먹을 수 있다. 들어가서 2시간 동안 채소뿐 아니라 고기까지 마음껏 무한대로 주문할 수 있고, 2인 기준으로 4만원 정도 들었다. 다만 현금으로 내야 한다. 타이완은 아직 카드를 받지 않는 곳이 많이 있어서 현금을 넉넉히 준비해야 한다. 



훠궈집 馬辣(頂級麻辣鴛鴦火鍋)




무한리필 훠궈의 위용



가득 부른 배를 부여잡고 친구가 다니고 있는 대만대학으로 갔다. 정문 앞에 펼쳐진 야자수 거리와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하는 학생들이 많아 보기 좋았다. 이곳에서 친구의 친구를 만났다. 러시아 출신으로, 1살 때 타이완에 와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싱가포르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타이완이 그리워 대학 진학을 타이완으로 했다고 한다. 내가 잘하고 싶은 3개 언어(영어, 중국어,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니 부러웠다. 중문학과 희곡을 복수전공하며 드라마 작가의 꿈을 키우고 있는, 고양이를 닮은 친구였다. 이름은 올가. 



야자수가 늘어서 있는 대만대학 정문



이 친구들과 함께 대만대학 근처에 있는 작은 서점가를 거닐었다. 역시 대만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었으며 지금은 같은 그룹에 근무하고 있어 언제든지 메신저에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학교 선배가 있는데, 이 분이 여서점(女書店)이라는 곳을 추천해줬기 때문이다. 꼭 가보고 싶었다. 중화권 최초의 여성주의 및 LGBT 전문 서점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지내는 동안, 여성주의자도 아닌 일반 남녀 학생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고 "남성우월주의(大男子主義)가 너무 강렬해!"라고 자주 말하는 것에 깜짝 놀라고는 했었다. 한국 사람들은 그냥 그게 디폴트라 딱히 체감하지 못하는데, 중국에서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그걸 느끼고는 지적을 하는 것이다. (특히 '오빠'라는 말은 대부분 다 알고 있는데 그 호칭의 뉘앙스와 연애관계에서의 함의에 대해서 다 안다.)  


그러고 보니 중국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아버님이 닭도리탕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 주셨던 기억, 구정에 친가와 처가 식구들이 여럿 모여서 다같이 요리를 해먹는 걸 본 기억이 생생하다. 이쯤 되면 중국 문화권의 젠더관계는 한국에서의 그것과는 꽤 다르다는 뜻이다. 아마 타이완은 마오쩌둥의 영향을 받아 전통을 일거에 타파해버린 중국 본토와 다른 점이 있겠지만, 중화권 최초의 여성주의 서점이 타이페이에 있다니 꼭 방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버지니아 울프 액자. 한때 웹상 밈이었던 "This is what a feminist looks like" 캡션 깨알같다.



버지니아 울프 액자 밑에 놓여있는《3기니》와 《자기만의 방》 중문 번체판. 세로쓰기로 되어 있다.



올가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찾아낸 여서점. 들어가자마자 버지니아 울프 포스터가 있고, 그 밑에 자기만의 방 그리고 3기니가 놓여 있었다. 자기만의 방을 사러 온 거라 낼름 집어들었다. 돈 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읽은 가장 절실했던 책 중 하나. 한글판을 읽은 지 오래된 관계로 중문판을 바로 읽으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한글판을 복습하고서 바로 펼쳐 읽을 생각이다. 3기니는 한글판으로도 좀 어려운 편이라 포기, 다음 기회에. 


올가가 책 하나를 추천해주어 자리잡고 앉아서 읽었다. 책 먹는 여우. 책 먹어치우다가 책을 직접 쓰게 된 여우에 대한 이야기다. 희곡작가를 지망하는 올가 자신의 얘기 같았다. 다 읽고 나니 역시나 올가가 사려고 집어 들었다. 



프란치스카 비어만의 동화 《책 먹는 여우》 중문 번체판



《정월 초하루에 처가로(大年初一回孃家)》라는 책도 구입했다. 중국 전통습속과 성별관계에 대한 재밌고 짧은 에피소드들이 여럿 수록돼 있다. 챕터 하나당 분량이 길면 읽어내리기가 어려운데, 글 한 편당 몇 쪽 되지 않아 딱 읽기 좋도록 구성돼 있었다. 정월 하니 생각나는 설날 추억이 하나 있다. 


2011년에서 2012년으로 넘어가던 춘절(중국 음력설날) 연휴 기간에 신장을 여행 중이었다. 투르판을 보고 우루무치로 돌아온 날이 음력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마이티엔 호스텔로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아저씨가 외국인 혼자 설무슨 재미냐며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시는 게 아닌가. 나를 태워다 주고 나면 어르신들을 모시고 집으로 갈 참이라 하셨다. 공중 목욕탕에 계시다는 어르신들께 전화를 하셨는데 전화상대방 목소리가 다 들렸고, '에이 설마 민족 대명절에 범죄를 저지를 리가 없다! 믿어 보자.' 하는 생각 끝에 용단을 하고 따라갔었다. 다행히도 정말 친절한 가족들이 따뜻이 맞으며 성대한 만찬을 준비해 주셨다. 온 가족이 한 해를 떠나보내며 폭죽놀이 하는 것도 구경할 수 있었다. 숙소로 안전히 돌아와서는 해가 바뀌는 순간에 무수히 터지는 폭죽 소리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사람들에게 전화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중국에서는 음력 한 해의 마지막날 저녁 식사를 하는데, 온 친가 식구가 모여서 같이 준비해 먹으며 年夜飯이라고 한다. 정월 둘째날에는 처가를 방문한다. 첫째날 즉 초하루에 처가로 갈 수 없는데, 왜 그런지에 대한 글이 수록돼 있다.


참고로 내륙 중국에서는 마오쩌둥 때 이미 제사가 폐지되었기에 춘절의 유교적인 의미는 거의 퇴색돼 버렸다. 우리 집은 제사를 꼬박꼬박 지내고 있는 관계로, 설날 때마다 병풍과 위패가 보이는 차례상, 그리고 떡국 사진을 찍어서 중국 친구들에게 보여주고는 한다. 같은 음력 설날이지만 비슷한 듯 조금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생각했는데, 마침 이 습속을 다룬 읽기좋은 책이 있어 반가웠다. 



여서점에서 건진 좋은 책



서점을 나와서는 역시 대만대학 근처에 있는 모스크 나들이를 갔다. 중국에 있던 동안 위구르어과 친구들과 함께한 기억, 그리고 신장을 여행한 추억이 워낙 좋게 남아 있어서인지 이제는 여행을 갈 때마다 해당 도시의 모스크는 꼭 신경 써서 방문하는 편이다. 금요일이라 낮에 갔으면 예배일이어서 흥성흥성했을 텐데 이미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셔터 내리기 직전에 인도네시아 출신 무슬림이 친절하게 소개해 주었다. 이슬람의 다섯 가지 기둥,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성지순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어찌나 수다스러운지. ㅋㅋㅋ 다른 곳은 일반 여행자가 갈 수 없지만 제다는 갈 수 있다는데, 제다는 우리 팀에서 비즈니스가 있는 곳이다. 담맘도 물동량이 많아 언제나 빼놓지 않는 기항지다. 언젠가 꼭 출장 가보고 싶은 사우디아라비아.



중국어로 적혀 있는 이슬람의 다섯 기둥. 중국어로 어휘들이 어떻게 적혀 있는지 보려고 찍어왔는데 번역은 다음번에.


밤이라 거의 보이지 않는 모스크



모스크를 둘러본 후에는 24시간 하는 딤섬집에 가서 딤섬을 먹었다. 딤섬은 역시 점심에 먹는 게 최고지만 여전히 맛있었다. 하루종일 훠궈에 딤섬에 북쪽이고 남쪽이고 할 것 없이 맛있기가 짝이 없는 중국 음식을 실컷 먹어 행복했다. 나는 보통 여행 중에 밥을 잘 못 챙겨먹는 편이다. 볼거리를 제1순위로 하다 보니 동선에 맛집까지 고려하지 못하고, 이동 중에 운 좋게 얻어 걸리기 바라는 편이다. 이번 타이페이 여행은 (1) 친구 만나기, (2) 책 사기, (3) 쉬면서 맛있는 것 먹기, (4) 고궁박물관 가기 이렇게 네 가지가 목표였는데, 첫날 무한리필 훠궈와 24시간 딤섬집 방문으로 식도락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景星港式飲茶라는 이름의 딤섬집. 홍콩식 염차(yumcha, 차와 간식) 가게.



느즈막히 숙소 근처로 돌아와서는 시먼딩 근처를 산책했다. 밤 12시가 가까운 시간이지만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그 유명하다는 화장품 밀크티도 드디어 사 마셨다. 병 모양이 화장품병처럼 생겨서 그런 별명이 생겼는데, 한 병에 900원 남짓이고 여러 가지 맛이 있는데 네 병 챙겨왔다. 살살 녹는다. 타이완에 가면 꼭 한번 마셔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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