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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

bravebird 2023. 4. 18. 22:59

2014년 여름에 모스크바의 니콜라이 고골 박물관에서 알게 된 러시아 친구가 있다. 말이 친구지 나보다 십수 년 연장자다. 그해 겨울에도 모스크바에 또 가는 바람에 이제까지 두 번을 만났다. 

 

이 분은 인도학을 전공한 분으로, 저번 겨울에 콜카타에 갔을 때 아시아틱 소사이어티에서 이 분의 박사논문이 출판되어 있는 것도 보았다. 근데 인도 철학에 대한 내용으로 내가 전혀 읽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사지는 못했다 ㅋㅋㅋㅋㅋ

 

이 분은 현재 오로빌리언이다. 그리고 예전부터 한국의 약간 마이너한 예술 영화를 은근히 즐겨 보셨던 것 같다. 옛날에 취화선을 정말 감명깊게 봤었는데 오로빌의 영화 동아리에서 상영할 예정이라고 하셨다. 상영회를 앞두고 내게 특별히 부탁을 하셨다. 취화선을 한번 보고 영화, 배우, 감독에 대한 질문을 좀 해도 되겠냐고. 흔쾌히 도와드리기로 했다. 

 

유튜브에서 영화를 대여해서 잠자기 전에 한 시간씩 이틀간 나눠서 봤다. (두 시간짜리 콘텐츠를 앉은 자리에서 도저히 볼 수가 없는 몸이 됨) 상당히 전개가 빠르고 역사적 배경이 전혀 친절하지 않게 헤비하게 제시되는 영화였다. 물론 역사를 전혀 모른 채로 주인공의 심리에만 주목해서 보아도 내용 이해에 문제는 없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동양화의 상징적 소재들이나 영화 속에서 불친절하게 지나가는 구한말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제목인 '취화선'이 Chihwaseon으로 번역이 되는 것 같던데 그것 자체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난 적어도 영화 제목만큼은 무슨 뜻인지 확실히 이해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신선이 무엇인지 설명해야 했는데 문자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이미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ppt를 만들기로 했고 회사 점심 시간에 사람들이 아래층에서 잡담하고 있는 사이에 17슬라이드짜리를 뚝딱 만들고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몰입은 무서운 것이고 시간은 귀중한 것이다. 

 

모르는 것이 없는 줄 알았던 친구가 나의 슬라이드를 보고는 그동안 영화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며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해주어 고맙다고 해서 뿌듯하였다. 특히 취화선이라는 제목을 이해시켜 드릴 수 있어서 기분 좋았다. 장승업과 딱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했다. 

 

 

 

이상이 영화에 대한 기본 정보 슬라이드. 영화에서 불친절하게 휙휙 넘어가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정도는 제시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ppt로 만들다 보니까 욕심이 생겼다. 초안은 생각보다 금방 만들었지만 수시로 조금씩 계속 업데이트 해서 완성도를 높이려고 했다. 

 

이 뒤에는 몇 가지 질문에 대해 답변해 드렸는데 일부만 가져와 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 유명한 감독에 대한 질문에 봉준호, 박찬욱, 홍상수, 이창동, 김기덕을 꼽아보았다. 영화를 모르는 나도 아는 이름일 정도이니 무난하게 소개가 되었다고 믿겠다.

 

생각해 보면 봉준호 영화를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홍상수 영화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 편을 옛날에 극장까지 가서 봤는데 도저히 견딜 수도 없는 개노잼이었다. 대체 뭐라는 건지 줄거리도 기억 안난다. 그 이후로 절대 다시는 홍상수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범죄자 김기덕의 영화는 기괴하고 끔찍하고 불쾌하다. 예외로 '빈 집'은 대학생 때 재밌게 보긴 했다. '숨'은 내가 장첸을 좋아해서 일부러 봤는데 기분이 몹시 나빴다. 이후에는 김기덕 영화를 본 적 없다.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기존에는 인상깊게 본 영화로 꼽은 적이 많았다. 또 주연도 취화선과 똑같이 최민식이니 적극 추천도 해드렸다. 다만 이제는 좋아하는 영화에 꼽지는 않는다. 왜냐면 이제 난 20대가 아니라서 생활의 피로가 증가했고 심신도 그때보단 약간 늙어서 보수화 되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 처절한 복수와 근친상간과 범죄로 가득찬 극단의 예술 세계를 누비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다리 벅벅 긁으면서 천장 쳐다보고 쉬는 게 훨씬 더 좋다. 쉬려고 모처럼 튼 영화에서 괴롭힘 당하고 싶지가 않다. 

 

영화는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것이 최고 아닐까!? 좋아하는 영화로 여전히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얼핏 떠오르기로 탑건, 행오버, 공각기동대 극장판, 와호장룡 정도이다. 예전에는 그 이외에 킬빌, 올드보이, 8월의 크리스마스, 무간도 같은 것들이 더 있었다. 하지만 익스트림하거나 너무 슬프거나 한 영화는 이젠 favorite에 낄 수가 없다. 예술보단 마음 편한 것이 훨씬 더 중하다. 또 예전에는 왕가위 영화를 아주 좋아했고 그것 때문에 홍콩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제 그런 멋들어진 영화들도 그다지 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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