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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지지 않는 벚꽃

bravebird 2025. 6. 27. 00:49

오래전 글로 알았던 사람이 있다. 얼마 전 출근길에 그 사람이 지하철 출입구로 들어가는 걸 우연히 봤다. 실제로 만난 적 없으나 뒤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의 모습도 알지만, 그는 나를 활자로만 안다.

 

개찰구를 지나며 거리가 좁혀졌을 때 바라보았더니 역시 그 사람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 사람이 문득 활짝 웃었다. 그 찰나, 마치 나를 알아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다른 생각을 하던 표정이 옮겨온 것일 테지만. 나를 알아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개연성은 희박하다. 어쨌든 그 이후 내게 시선이 머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는 바로 다음 역에 내렸고, 내가 서 있던 문간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강산이 바뀔 세월만큼 서로 활자로만 아는 사이. 그나마도 몇 년에 한 번 인사 몇 마디 할까 말까 하는 정도. 그러나 서로의 존재는 분명히 알고 있으며 성의가 담긴 교류가 있었다. 나는 뒷모습만으로도 바로 알아보았지만 그는 몸뚱이로서의 나는 아마도 전혀 모른다. 이런 극단적인 비대칭은 어딘가 엿보는 듯한 기분이어서 천성대로라면 인사를 건넸을지 모른다. 사실 그런 일은 내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반가웠으므로 끝내 말을 걸지 않았다. 

 

또 마주칠 가능성이 높다. 그 누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이것이 단순한 직감이 아니라 명확한 현실이라는 점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매번 같은 선택을 반복할 것이다. 어떤 순간이나 존재를 가만히 바라보고, 해석하지도 확정하지도 않은 채 스스로 그러하도록 두면 거기서 무한을 엿볼 수 있다. 지금 그 한 정거장의 촌음을 떠올리는 일은, 우려도 우려도 은근한 향이 남는 백차 같다.

 

이런 것은 말하거나 글로 쓸수록 점점 이지러져 간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말하고 싶고 글로 쓰고 싶은 것이 바로 시와 예술의 원천인가 한다. 언뜻 떠오른 마츠오 바쇼의 하이쿠 한 수를 남기며 이쯤 접는다.

 

命二つの中に生きたる桜哉

두 사람의 삶

그 사이에 피어난

벚꽃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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