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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 요약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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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 요약 (2)

bravebird 2015. 9. 30. 01:41

제3장: 하급무사에서 '지사'로

 

사쓰마와 조슈 등 웅번의 하급 무사들은 존왕양이 및 도막운동 노선을 형성함으로써 점차적으로 번정부를 장악하였다. 이처럼 도쿠가와 체제의 주변부에 속했던 하급 무사는 어떻게 새로운 정치체제 구축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는가?

 

존왕양이론은 도쿠가와 후기 미토번에서 성장한 존왕론의 영향을 받아 쇄국체제의 유지를 주장하는 사상이었다. 특히 1858년 이이 나오스케의 통상조약 체결에 대해 코오메이 천황과 미토번주인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강하게 반발한 것을 계기로 막부비판 논리로 자리잡았다. 교토에서는 천황과 양이파 공경들이 막부를 비판했으며, 다이묘 중에는 히토츠바시파 인사들이 항의했다. 지방에서는 조슈번과 미토번이 양이론을 번의 공식입장으로 채택했다.

 

일부 무사 중에서도 조슈번의 요시다 쇼인과 사쓰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 번주 및 그의 총애를 받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高森)가 대표적인 존왕양이파였다. 그들은 교토에서 다른 존왕양이파 인사들과 접촉하며 양이를 모색했다. 이후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사쿠라다몬 밖의 변)을 통해 존왕양이론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같은 지사들은 국책 결정에 적극 개입함으로써, 하급무사의 정치참여를 배제했던 도쿠가와 막부의 신분 규율을 부정했다. 또한 번 내외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기존의 지역, 신분 경계를 초월한 정치행위를 시도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


쿠사카 겐즈이


사카모토 료마

 

도막운동 시기가 전개되면서 존양왕이운동의 지사로 활약했던 각 지방의 하급무사들이 주도 세력으로 본격 부상한다. 도막운동은 1865년 조슈의 도막정권 수립으로부터 시작된다. 조슈는 막부의 조슈정벌 등을 통해 존왕양이파가 큰 타격을 입고 친막부 온건파가 번정을 장악했으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가 쿠데타를 통해 급진파 정권을 수립한다. 그는 존왕양이운동이 몰락하고 조슈 존립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존왕양이사상의 명분론적 공격론에 반대하고 경제적, 군사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한 사람이었다. 다카스키 신사쿠는 정권 탈취 후 군제 개혁을 단행했으며, 양이론을 과감히 포기하고 개국정책을 취함으로써 외국무역을 통한 부국강병을 꾀했다. 이러한 파격적 결정은 1864년 시모노세키전쟁에서 조슈번 포대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의 4개국 연합함대에게 함락된 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다카스기 신사쿠

 

사쓰마의 도막운동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高森)와 오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시마즈 히사미츠가 공무합체운동에 회의를 품기 시작하면서 번의 정책에 반막부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을 기회로, 본격적으로 반막부운동을 전개했다.


오오쿠보 도시미치

 

1866년 초 삿초동맹이 성사되면서 도막파는 막부군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확고히 하였다. 동맹체결 사실을 알지 못했던 막부는 그 해 제2차 조슈 정벌을 단행하고 사쓰마에 군사동원령을 내렸다. 조슈와 동맹을 맺은 사쓰마는 막부 동원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조슈가 필요로 하는 각종 무기와 함선의 구입을 도왔다. 막부는 조슈에 계속 패하였고 이는 도막운동이 격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도막파의 공세가 본격화되자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전격적으로 대정봉환을 신청하고, 천황은 그 다음날 이를 승인한다. 이 대정봉환의 노선은 토사(土佐)번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와 사카모토 료마의 의견을 바탕으로 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공의정체론에 의거한 선중팔책(船中八策)을 통해 막부반환, 의회개설, 관제개혁, 외교쇄신, 법전제정, 해군확장, 친병설치, 화폐제도 정비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번주를 설득하여 공의정체론을 번론으로 확정했고,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오쿠보 도시미치를 설득하여 삿토맹약을 맺었다. 막부가 토사번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정봉환을 실천한 것은 결국 고조되는 무력도막의 위기 속에서 대정봉환을 통한 공의정체의 실시를 하나의 탈출구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대정봉환


고토 쇼지로


대정봉환은 도막운동의 좌절 위기를 초래했다. 막부 입장에 대한 지지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도막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이에 대한 사쓰마와 조슈의 선택은 군사 동원에 의한 무력 도막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메이지유신이 단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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