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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 요약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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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 요약 (1)

bravebird 2015. 9. 30. 01:03

제1장: 페리 내항과 막부의 개국정책

 

1853년 페리 함대(흑선)가 에도 앞바다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벌인 이듬해, 미국과 일본은 미일화친조약(카나가와조약)을 체결한다. 1858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면서 개항장이 카나가와, 하코다테, 니가타, 효고, 나가사키의 5개로 늘어난다. 에도와 오사카는 개시장으로 정해졌으며, 에도에는 공사, 개항장에는 영사 주재를 허용하게 되었다. 외교대표의 국내여행과 외국인의 개항장 거류 및 개시장 체재 역시 허용된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이 시행되었으며, 협정관세를 채택하고 외국화폐가 자유로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특히 영사재판권, 협정관세율, 편무적 최혜국대우 등의 불평등한 규정이 성문화된다.

 

이처럼 막부는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하여 2차례에 걸쳐 개국조약을 통해 쇄국정책을 폐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체결에 대한 비판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막부의 전제 권력이 도전받게 된다. 그 발단은 막부가 개국문제를 공론화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막부는 조약 체결에 앞서서 막부 관리 이외에도 그동안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해왔던 조정과 유력 다이묘에게까지 자문을 구했다. 이후 통상조약 체결을 위한 조정과의 논의과정에서 코우메이 천황이 막부가 요청한 조약칙허를 불허하면서 막부는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미국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천황의 반대를 무시하고 조약 체결을 감행하자, 천황과 그 측근 및 유력 다이묘와 일반 무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에 걸쳐 막부 타도 움직임이 거세어진다.


이이 나오스케

 

먼저 천황은 통상조약 체결을 문책하는 내용의 밀칙을 미토번에 내려 반대운동을 촉발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천황의 정치 개입은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일반 무사들 사이에는 존왕양이론이 확산된다. 실제로 조슈(長州)번 무사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존왕양이론을 주장하면서 막부 고위관리 암살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에 막부는 먼저 1858년 안세이의 대옥을 통해 존왕양이파 및 개혁정치를 주장하는 세력에 대해 강경탄압을 실시한다. 이에 굴복한 조정은 사실상 조약체결을 양해하는 칙서를 내리며 이에 따라 막부 비판세력은 철저히 배제되지만, 이러한 성과는 단지 일시적일 뿐이었다. 1860년, 탄압의 주역이었던 이이 나오스케가 에도성의 사쿠라다몬(桜田門) 밖에서 미토(水戸)번 출신의 양이파 무사들에게 암살당하면서(사쿠라다몬 밖의 변) 도쿠가와 막부의 권력체계는 심각한 한계점에 도달한다.


요시다 쇼인

 

 

제2장: 막말 정치와 웅번

 

이처럼 일본의 개국은 단순한 문호개방에 그치지 않고 도쿠가와 체제의 약화 및 새로운 도전세력의 성장이라는 정치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막부 말기 일본의 거대한 지방세력, 즉 웅번(雄藩)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개국조약 이후 약화된 막부의 권위를 대신하여 조슈, 사쓰마와 같은 지방 웅번들이 정치력을 크게 확대하며 중앙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실제로 사쓰마(薩摩), 아키(安芸), 오와리(尾張), 에치젠(越前)과 같은 웅번들은 1867년 12월 9일 메이지 유신 당시 군사력을 제공한 주역으로서, 막부체제 종식에 있어 주역을 담당했다. 이는 19세기 중반의 번정개혁을 통해 각 웅번들이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쿠가와 시대는 막부와 번의 균형관계에 기반했기 때문에 흔히 '막번제 사회'로 불린다.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의 세력가인 다이묘들에게 '번'이라는 독자적 세력기반을 부여한 대신, 막부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요구했다. 다이묘의 권한은 자신의 번 내부에 머물렀으며, 번을 넘어선 국가통치는 막부가 독점했다. 막부는 전국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부 다이묘를 관리로 참여시켰는데, 이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깊은 주종관계를 맺었던 세력으로서 후다이다이묘(普代大名)라고 불렸다. 반면 잠재적인 막부 위협세력은 막부 정치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다. 막부와 혈연관계를 가진 신반다이묘(親藩大名),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주종관계를 약속했지만 독자적 세력기반을 지닌 지방세력이었던 도자마다이묘(外様大名)가 대표적이었다. 교토의 천황 역시 막부의 경계 대상이었다. 막말의 웅번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막부-번 관계를 벗어나, 쇼군 후계자 결정과 같은 막부의 중심 권력 문제에 개입하는 등의 독자적 정치행보를 통해 막부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미 막말의 일본사회에서는 막번 체제가 동요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변화상은 페리 내항 직전의 텐뽀개혁(天保の改革)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830년대는 대기근으로 농민반란이 속출하였으며, 1840년에는 아편전쟁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본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에 1841년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의 주도로 텐뽀개혁이 실시된다. 미즈노는 막부와 무사층의 절약을 중시하며 물가인하를 위해 동업조합의 해산령을 내렸다. 1843년에는 에도와 오사카 근처의 영지를 막부령으로 변경하고자 하여 해당 영주층과 농민의 반발을 샀고, 결국 반대세력의 반발로 미즈노가 해임되면서 막부에 의한 텐뽀개혁은 실패로 끝난다. 이와 같은 막부 개혁정책의 실패는 연공수입에 기반을 둔 도쿠가와 체제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 18세기 이래로 일본에서는 상품생산과 시장경제가 급속히 진전되었지만 쌀생산에 기반을 둔 막부의 연공징수제는 경제적 변화에 효과적으로 적응하지 못하였고, 재정난은 심화되었다.

 

이처럼 막부가 텐뽀개혁에 실패하여 정치, 경제적 통제력이 약회된 반면, 지방에서는 여러 번들이 번정개혁에 성공했다. 번정부가 직접 지역특산물의 전매제를 실시하여 재정 자립을 확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번들은 강력한 영주권을 바탕으로 번의 상품경제를 장악하고, 번을 넘어선 지역과의 상품유통 및 해운업을 통해 경제력을 강화함으로써 막부 중심의 전국시장을 약화시켰다. 그 대표적 사례가 조슈와 사쓰마였다. 그렇다면 중앙정치로부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조슈는 어떻게 중앙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조슈가 중앙정치에 본격 등장한 것은 1861년 항해원략책(航海遠略策)을 번론으로 채택한 이후부터였다. 이 무렵은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에 이어 안도 노부마사의 습격사건(사카시타몬 밖의 변)까지 발생해 막부의 위상이 형편없이 추락한 가운데, 유력 다이묘의 발언권이 급격히 성장한 시기였다. 조슈는 이러한 시점에서 변화하는 대외정세에 소극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항해, 즉 적극적인 개국정책을 펼쳐 새로운 세계로 진출하자는 항해원략책을 지지하였다. 조슈는 조정이 막부에게 '항해'의 방침을 취하여 세이이타이 쇼군(征夷大将軍)으로서의 직무를 다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막부가 이를 실천에 옮긴다면 대내적으로는 일본의 정치적 통합을, 대외적으로는 국위 선양을 가능케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번 내의 분위기가 바뀌어 존왕양이론으로 기울면서 조슈번이 존왕양이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지만, 그 과격한 양이론이 막부와 공무합체파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하였다. 결국 막부는 1864년 조슈 정벌을 성공시키고, 조슈는 당분간 중앙정치로부터 축출된다.



출처: http://homepages.stmartin.edu/Fac_Staff/rlangill/HIS%20217%20maps/Outer%20Daimyo.jpg


 

사쓰마는 번주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막부의 중앙정치에 개입하였다는 점에서 번사층의 역할이 두드러졌던 조슈와는 차이가 있었다. 사쓰마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는 막부 개혁 주장, 사쓰마 내 개혁정책 실시, 개국론 주장 등을 통해 국정에 적극 참여했으며, 쇼군 후계자 결정에 있어서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한 히토츠바시파의 일원으로 활발항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안세이 대옥 당시 근신에 처해져 정치적 발언을 금지당한 중 급사하였다.

 

이후 나리아키라의 이복동생이자 새 번주의 친부로서 번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가 1천 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해 코오메이 천황을 알현했다. (率兵上京) 그는 존왕양이파의 급진적 행동을 제어해야 한다고 청하고, 막부와 조정의 협조 필요성을 진언했다. 이른바 공무합체노선을 취한 것이다. 시마즈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당시 교토에 집결해 있던 사쓰마의 존왕양이 과격파를 급습하여 제거한 테라다야(寺田屋) 사건을 일으켰다. 조정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시마즈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안세이 대옥 당시에 탄압받은 히토츠바시파 다이묘들이 사면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전례가 없는 것이었으며, 더구나 군사력을 배경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것은 막부 권위가 얼마나 추락하였는지를 보여주었다. 이후 시마즈 히사미츠가 공무합체운동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사쓰마 번사들은 보다 다양한 정치활동을 벌였으며, 조슈 도막파와의 삿초동맹을 성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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