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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또 다른 비스마르크를 만나다

bravebird 2015. 8. 16. 22:17

오토 폰 비스마르크. 오래 전에 외교학 수업 들을 때 아 이런 천재도 있구나 + 정신없어 죽겠다, 라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제동맹이니 삼국동맹이니 재보장조약이니 으으 디테일은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하지만 저 모든 걸 거미줄 짜듯 구상해서 독일을 통일하고 프랑스를 한땀한땀 옭아매버린(!!) 신출귀몰한 외교가 비스마르크에 대해 경외감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차라리 행정은 하면 했지, 현실정치가나 외교관 같은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잘하지 못할 성격입니다. 기민하게 흐름을 읽고 정확하게 패를 가늠해서 상황상황에 맞게 타짜 기질을 발휘해야 하는 정치란... 천성적으로 너무 안 맞습니다. 그런 제게 원천적인 불능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정치를 비스마르크는 저토록 아크로바틱하게 해냈습니다. 고기 못 씹는 할머니가 스무살 장정을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비스마르크 일화 모음집 『또 다른 비스마르크를 만나다』를 읽었습니다.   





일화집에서 만난 비스마르크는 저 험상궂은 인상과는 달리 유머감각이 상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배포도 컸습니다. 


보불전쟁 승리 후 전쟁 보상금을 협상할 때, 프랑스 측이 이건 강탈이나 다름없다며 품위가 없다고 비스마르크를 몰아세웠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잠자코 독일어로 말을 바꿔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상대측에서 영문을 묻자, 그가 태연자약하게 대꾸합니다. "당신이 조금 전 품위가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용어를 정확히 이해하기에는 제 프랑스어 실력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당신과 모국어로 말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매번 내 생각을 잘 알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해서 프랑스 측은 진정하고 다시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프로이센은 결국 터무니없는 보상금 요구를 관철시킵니다. 파리 입성 당시에는 프로이센군에 맞서 시위하는 파리 시민 중 가장 험상궂은 1인에게 비스마르크가 직접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담뱃불 좀 빌려줄 수 있겠소?" 


일촉즉발의 긴장상황을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당해내는 모습이라니. 그야말로 불세출의 외교가란 이런 거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상대가 약을 올리면 그대로 약이 오릅니다. 한 발짝 떨어져서 여유롭게 수작을 부려볼 생각을 못합니다. "가만있는 사람 약올리면 안된다"라는 원리원칙만 기억하기 때문에, 이미 벌어진 상황을 재치있게 요리해볼 생각을 잘 못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어떻게 이렇게 잘못된 것들이 버젓이 용인되지?" 같은 생각에 잠겨 혼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원칙에만 집중하다 보니, 이미 벌어지고 만 아수라장 판국을 요령있게 다뤄낼 재간이 부족합니다.  


또 목소리 큰 사람이 조금만 약을 올리면 그대로 걸려 들어갑니다. 회사는 애초에 시비를 거는 게 옳은가 그른가부터 따져보는 집단이 결코 아니기에, 태운다고 화르륵 불이 붙어버리는 저 같은 사람이 무조건 불리합니다. 내일 간만에 회사 가서 목소리 큰 사람들 상대할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아파오는군요... 


태운다고 타지 않고 비스마르크처럼 천연덕스럽게 행동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선 흔들리지 않는 소신과 자신감이 있어야겠고, 

그러려면 능력과 체력이 뒷받침되어야겠으며, (덩치도 좀 크면 좋겠고)

매사 한 발짝 떨어져서 천천히 관망할 수 있는 여유도 있어야겠지요. 


내일부터 가서 돌쇠처럼 일만 하고 가급적 부지런히 많이 챙겨 먹어야겠습니다. 태우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반응하지 말고 한 발짝 떨어질 것입니다. 그냥 별 대꾸하지 말고 허허 웃어버려야죠. 혹은 심지어 그냥 한번 져줘야겠습니다. 그렇게 해주더라도 내가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니까, 그냥 그 사람 좋은 대로 한번 양보해 주는거죠 까짓것. 


무엇보다, 그 사람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니 고이 접어둘 것입니다. 그 힘을 절약해서 내 가던 길을 조용히 가야겠어요. 


이렇게 기승전 회사갈 준비로 간만의 독서록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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