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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돌리드 논쟁과 유럽적 보편주의

bravebird 2016. 3. 24. 18:34

바야돌리드 논쟁 (Valladolid Debate)은 매우 흥미로운 논쟁으로 유럽사 최초의 인권 재판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도 인간인지, 유럽인이 인디오의 삶에 개입할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쟁론이다. 1550-1551 사이의 대항해시대에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에서 실제 벌어졌던 사건이다.


바야돌리드 논쟁은 후안 세뿔베다(Juan Ginés de Sepúlveda)와 바르톨로메 라스 까사스(Bartolomé de las Casas) 사이의 경합이었다. 세뿔베다는 인디오를 야만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서구인들이 무력 개입을 해서 카톨릭을 전파하고 미개한 관습을 끝장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라스 까사스는 인디오도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폭력과 악행이 아닌 설득과 가르침으로 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스파냐인 역시 로마인들의 눈에는 야만인에 불과했듯, '야만'이란 서구인의 기준일 뿐임을 지적했다. 



바야돌리드 논쟁을 주제로 한 연극 〈The Controversy of Valladolid〉의 한 장면. 출처는 사진 클릭.



인간에게는 일을 시키고 임금을 줘야 하지만, 인간 이하의 노예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결국 인디오를 인간 대접해야 하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경제적 문제였다. 세뿔베다의 입장은 '인간성'과 '문명' 그리고 '보편윤리' 같은 수사를 통해 서구 열강의 경제 침탈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세뿔베다의 주장은 오늘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개입, 유럽 국가의 시리아 개입, 서방 언론의 중국이나 러시아 비판을 뒷받침하는 논리와 똑같이 닮았다. 중동이나 중국이나 러시아가 잘했다는 건 결코 아니다. 나도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이상을 소중히 여기는 보통 사람이다!!! 하지만 서방국가들이 너무나도 자신있게 보편가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온갖 나라의 일에 개입하는 부분은 한번 의심해볼 만하다.


그 의심 때문인지 우연히도《유럽적 보편주의 - 권력의 레토릭》이라는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집어들고 보니 근대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저작이었다. 이 책이 바로 이 바야돌리드 논쟁으로 시작한다. 





월러스틴은 미국과 유럽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민주국가들이 내세우는 자유, 평등, 인권, 보편가치라는 레토릭이 역사의 산물이라고 했다.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모든 가치체계를 다 때려부숴 버리는 극단적 상대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에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월러스틴은 이들 논리가 그 자신의 진리성조차 상대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며 똑똑이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적 보편이 곧 전세계의 보편이라는 오만을 경계하기 위해, 유럽적 보편은 특정 세계체제의 지배층이 만들어낸 산물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월러스틴이 꼽은 유럽적 보편주의의 인식론적 토대는 세 가지. 첫 번째는 보편적 가치의 대변자들이 그렇지 않은 타자에게 얼마든지 개입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이다. 이 보편적 가치란 시대에 따라 기독교적 가치→문명과 계몽→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권개념으로 조금씩 모습을 바꿔왔다. 두 번째 토대는 오리엔탈리즘이고, 세 번째는 인문학과 이공학을 양분하여 후자에 힘을 실어주는 근대 대학체제와 학문권력, 그리고 이들이 뒷받침하는 과학적 보편주의다. 


이 중에 오리엔탈리즘 부분에서 재미난 점이 있다. 한국사 시간에 배운 자본주의 맹아론처럼 서구와의 접촉 없이도 유럽적 가치가 자생했다는 논리 역시 알고 보면 반유럽적 유럽중심주의로, 오리엔탈리즘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월러스틴은 이런 것으로는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고 일갈한다.


이미 1500년대에 바야돌리드 논쟁 같은 인권논의가 존재했다는 사실, 그리고 현대의 세계정치 이슈들도 그 변주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 큰 흥미를 갖고 읽어내릴 수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와 중동의 독재정권이나 군사적 팽창, 또는 테러리즘에 반대하지만, 이들에 대한 비난 일색인 서방언론은 또 눈에 불켜고 의심하는 내 이중적인 태도도 나름대로 정당성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ㅋㅋㅋ) 유럽적 보편이 아닌 진정한 보편적 보편을 어떻게 발견하고 정의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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