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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러시아

12/19 금(모스크바): 카우치서핑 모임, 새로 알게 된 러시아 사람들

bravebird 2014. 12. 24. 07:31

벨로루스키 역에 도착해서 저번처럼 지하철 타는 곳을 못 찾고 헤맸다. 두리번거리던 중에 누가 한국말로 말을 걸기에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니 웬 러시아 아저씨였다. 한국에서 20년 산 분인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 하셨다. 이름은 블라디미르. 슬라브 계열 성씨가 아닌 것 같은데 배경이 조금 궁금하다. 친해지면 여쭤 봐야겠다. 지하철 표도 하나 사 주시고, 숙소가 있는 키타이 고로드 지하철역까지 짧은 길이지만 동행이 되어 주셨다. 내리기 전에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도착해서는 쿠즈네츠키 모스트의 어느 바에서 열리는 카우치서핑 모임에 나갔다. 러시아에 코가 꿰이는 바람에 이제 자주 드나들 것 같으니까 현지인들을 만나기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출발 전날밤 급히 가입한 카우치서핑. 떠들썩한 모임을 썩 즐기지 않지만, 갈 곳도 없는 애매한 저녁시간에 방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갔는데 가길 잘했다. 술 마시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어색했는데 사람들이 워낙 친절하고 선했다. 거의 다 러시아인이었다. 


바에 딱 처음 들어갔을 때 일행이 어디 앉아 있는지도 몰라서 바에서 서빙하는 사람한테 물어봤다. 한국에서 놀러왔다고 하니까 북한에서 왔냐며, 러시아 좋아하는 거 보니까 영락없는 북한 출신 아니냐며 놀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 사장님이었다. 술을 맥주 딱 한 잔 시켰는데 지금 환율로 단돈 3000원 꼴. 그거 겨우 한 잔 시켰는데 서비스로 네댓 잔은 더 얻어마셨다. 사장님이 통이 크다. 러시아 사람 같지 않은 외모여서 주변에 물어보니까 알제리계 프랑스인이라고 했다. 


술 좀 들어갔더니 마침 사람도 많은 프라이데이 나잇이고 해서 제법 춤도 춰지고 아주 신났다. 춤추고 놀다 보니까 카우치서핑 사람들이랑 금방 친해졌다. 마침 그 다음날 바냐 모임이 있다며 초대해줬다. 나도 러시아 온천욕 해보고 싶은데!! 약속이 있어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마음이 고마웠다. 


밤이 깊어지자 사장님이 한국 친구 왔다고 강남스타일이랑 젠틀맨도 틀어줬다. 카우치서핑 사람들 뿐만 아니라 바에 놀러온 온갖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고 흔들었다. 그 중에 마리야라는 이름의 정말 너무도 이상적으로 매혹적인 친구가 나의 하잘것없는 춤사위를 굉장히 좋아했다. 서로 신이 나서 얼싸안고 춤추고 놀았다. 춤추느라 무려 바텐더들 일하는 자리를 점령했다. 기억에 남는 노래는 라디오헤드 크립, 인큐버스 드라이브, 비욘세 크레이지 인 러브 그리고 스눕독 드랍잇라잌잇츠핫. 바 전체를 위아더월드로 만드는 추억의 레퍼토리였다.


사장님 친구인 벨기에 아저씨랑도 오래 오래 이야기했다. 이름은 요한. 전공이 뭐냐길래 한국문학이랑 영문학 공부했다고 하니까 좋아하는 책이 뭐냐 물었고,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거 벨기에 얘기 아니냐며 반색.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 의식하고 대답한 것도 아니었는데! 아저씨 머리가 빡빡머리여서 지옥의 묵시록(=암흑의 핵심)에 나오는 커트가 생각난다고 했더니 껄껄 웃으셨다. 원래 한국에서는 조용한 편이라 춤추고 이런 일 거의 없는데 모스크바에서 여기 오니 너무 즐겁다니까, 어디 가서도 잘 생활할 테니 자부심 가지라고 말씀해 주셨다. 사실은 내 내향적이고 책상물림적인 성향이 과연 기업환경과 어울리는 게 맞는지 최근에 다시 한번 고민하고 있었는데, 말씀 듣고는 힘이 났다. 까짓거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뭐 다 잘 맞아서 회사생활 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배포를 크게 가지고, 내향적이니 책상물림이니 하며 스스로를 간단히 한정짓지 말아야겠다. 


거의 새벽 5-6시까지 바에서 놀았다. 돌아갈 때는 사장님이 밤길 위험하다고 호스텔 앞까지 데려다 주셨다. 그때 이름을 여쭤보니까 Ahcene이었다. r이 있으면 도둑 이름이라고 했더니 아르센 뤼팽 얘기하는 거냐면서 웃었다. 덕분에 청순 가련하게 비에 젖은 모스크바의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안전 귀환했다. 사장님은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는 게 인생 철칙이라는데 어떻게 그렇게 맨정신으로도 에너지가 넘치는지 모르겠네. 귀국하기 전에 다시 놀러오라고, 근처에서 저녁 사주신다고 해서 이메일 주소 받아왔다.


이렇게 모스크바의 사교계에 데뷔했다. 다음 방문 때도 또 연락해볼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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