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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일(모스크바): 대조국전쟁 박물관, 현대사 박물관, 크림 사태 본문

여행/러시아

12/21 일(모스크바): 대조국전쟁 박물관, 현대사 박물관, 크림 사태

bravebird 2014. 12. 24. 09:44

정신 차리고 제시간에 약속에 나갔다. 흐린 날씨였는데 주코프 동상이 회색 톤으로 더 근사하게 보였다. 매우 흡족한 사진들을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오늘의 행선지는 대조국전쟁 박물관과 러시아 현대사 박물관. 대조국전쟁 박물관이 있는 파크 포베디로 가서 건물 앞 오벨리스크와 성 게오르기 동상 사진을 실컷 찍었다. 기마상을 아주 좋아하는데 오늘따라 멋진 사진들이 잘 나와줘서 기뻤다. 대조국전쟁 박물관은 참 컸다. 각개 전투별로 디오라마도 잘 꾸며져 있고 볼거리가 많은데, 너무 많아서 트래픽에 무리가 왔다. 좀 피곤했다.

 


현대사 박물관이 있는 트베르스카야 거리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가는 길에 알렉산드르 아저씨에게 크림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여쭤봤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크림 주민투표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부산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일본 국민이 되겠다고 표결한 걸 우리가 수용해야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거라 하셨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당연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인인 자신의 입장은 따로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도 러시아 전통을 오랫동안 공유해온 러시아의 한 핏줄인데, 그런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푸쉬킨과 톨스토이의 언어를 내치고 러시아인을 압제자로 여기게 되는 상황이 마음 아프다고 하셨다. 


"크림은 러시아입니다" (러시아 현대사 박물관)


알렉산드르가 말하길, 현재의 러시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에 소련 때 정착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 출신 직장 상사는, 고향에 남은 자신의 누님과 더이상 대화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또 그 누님의 아들은 유로마이단 운동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잡혀갈 뻔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 집안 안에서도 정견에 따라 가족들 간에 이중 삼중으로 균열이 생기는 것을 통탄스럽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정치가 반러의 일환으로 파시즘에 경도되는 것도 우려스럽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국내정치의 극우 파시즘 경향은 알지 못하던 부분이었는데(관련 기사), 문제가 이렇게 되면 어떤 특정한 의견을 갖기가 정말 어려워진다. 


3월 16일 주민투표 선전: "파시즘에 반대하여 러시아에서의 밝은 미래를 위해 올바로 투표하세요." (러시아 현대사 박물관)


러시아를 오래 떠나 인도에서 살았으며 항상 인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학자도 우크라이나 건에 대해서는 대러시아주의 테두리 안에 있구나 싶었다. 나는 사실 전략요충지가 못내 아쉬운 러시아의 입장도 이해가 되고, 독립국으로서 영토주권이 침해받은 우크라이나의 상황도 공감 되고, 러시아로 편입되겠다고 표결한 러시아계 크림 주민들의 입장도 수긍이 되는데다 아무래도 방외인이라 특별히 어느 쪽 편을 들진 못하겠다. 그렇지만 파시즘과의 대결이라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운 채 독립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러시아, 독립 주권과 민주주의 옹호라는 외교 기치 뒤에 극우 파시스트 세력이 준동하는 우크라이나. 사태 전체가 생각보다도 더욱 복잡다단해서 무 자르듯 어느 입장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대사 박물관에서는 이미 크림 병합에 관한 코너가 마련돼 있었다. 크림 주민 투표 용지도 있고, 표결 후 러시아 깃발을 내건 사진도 있고, 푸틴이 크림 주민투표 결과에 서명하는 장면도 있었다. 러시아 연방 지도에서 올해의 크림 병합 이후에 국경선을 빨간 매직으로 새로 그어 업데이트 해놓은 것도 발견했다. 


크림 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연방 편입. 2014년 3월 18일 모스크바. (러시아 현대사 박물관)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크림 타타르어 3개 언어로 작성된 크림 반도 주민투표 용지. 러시아적 요소를 배척하는 우크라이나 분리 세력과는 달리, 러시아 병합 지지 세력은 크림 반도 여러 민족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의 일환이라는 것이 알렉산드르의 의견. (러시아 현대사 박물관)

 

크림 반도 부분을 빨간 매직펜으로 새로 그어 영토 업데이트. (러시아 현대사 박물관)


호스텔에 돌아와서 쉬다가 레닌그라드 기차역으로 갔다. 카메라가 없어진 걸 그때 알았다. 전화기를 빌려 호스텔에 전화해봤지만 못 찾았다. 감쪽같이 도둑을 맞았거나 뛰어다니다가 떨어뜨리거나 했나 보다. 예전에 중국에서 찍은 사진들도 다 들어있고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사진도 많이 있었는데 다 날아갔다. 무엇보다 아침에 찍고서 아주 마음에 들었던 주코프와 게오르기 기마상 사진들도 싹 사라졌다. 비자발적인 방식으로 과거로부터 단절되었다. 마음 한구석에 남겨두려고 했던 것들을 한순간에 뺏겼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어떻게 보면 소유도 추억도 집착이고 고통이겠지. 잊히는 것은 잊히는 대로 남는 것은 남는 대로 둬야겠지. 지나간 것에 얽매이지 말고 곧장 나아가라는 교훈인가 보다. 러시아가 정신건강도 챙겨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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