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12/22 월(페테르부르크): 물건 분실, 러시아 박물관, 밤 산책 본문

여행/러시아

12/22 월(페테르부르크): 물건 분실, 러시아 박물관, 밤 산책

bravebird 2014. 12. 28. 20:08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예전에 묵었던 카잔스카야 거리에서 숙소는 다른 곳에 묵게 되었는데, 호스텔은 저번처럼 아파트 한 칸을 개조해서 만든 공간이었다. 저번처럼 찾아 들어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는 비밀번호를 몰라서 일단 초인종을 눌렀더니 누군가가 러시아어로 뭐라고 하더니 마지못해 문을 열어줬다. 일단 단지 안에 들어갔는데도 어디 있는지 잘 못 찾겠어서 한참 헤맸다. 물어물어 호스텔이 있다는 현관에 들어갔는데도 어디인지 모르겠어서 현관에서 도와달라고 짜증 섞어 소리치고 말았다. 그랬더니 내 짜증에도 전혀 당황하거나 흐트러지지 않은 차분한 인상의 남자가 하나 내려와서 짐 옮기는 걸 도와주고 호스텔로 안내해 줬다. 이름은 스타니슬랍. 차분하고 평온한 사람 앞에 서니 바로 홧기가 수그러들었다. 이번 숙소는 1인실인데 겨우 900루블. 밝고 깨끗했고 방 안에 이런저런 시설도 잘 되어 있었다. 사람도 몇 없어 고요했다. 저번 숙소도 아주 좋았고 배 나온 사장 아저씨도 푸근하니 친절하셨지만, 카잔스카야 거리 좀더 깊은 곳 스톨랴르니 골목 가까이에 있어서 네프스키 대로로 나가려면 시간이 좀 걸렸었다. 이번 숙소는 카잔스카야 8번지라 초입이라서 접근성이 더 높았다.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명함을 챙겨왔다.

 

사실 호스텔까지 오는 길에 책도 한 권 잃어버린 걸 발견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러시아 미술사》라는 책인데 이미 절판되어 구할 수도 없는 것이다. 러시아에 와서는 본 적도 꺼낸 적도 없는데 도대체 어디로 새어나갔는지 모르겠네. 정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하물 검사 때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어서 대한항공에 클레임 메일을 보냈다. 그러고 나니 벌써 오후 한중턱을 넘겼고 영 의욕도 나지 않았다. 러시아 박물관밖에는 갈 수가 없었다. 예술 광장에 가서 푸쉬킨 아저씨한테 눈인사 하고, 박물관 들어가서는 제일 좋아하는 레핀 방에 가서 실컷 구경했다. 기억하고 싶은 다른 그림과 화가들도 조금 메모해왔다. Constantin Yuon이랑 Dmitry Zhilinsky라는 작가들 그림이 다 마음에 들었고, 지금 찾을 수 있는 것으로는 아래 두 점도 좋았다. 이콘 중에서는 성 게오르기와 니콜라이 그림들도 좋았는데, 아래 두 점 빼고 나머지는 러시아어로 적어온 관계로 타이핑을 할 수 없어 당장은 검색 불가. 러시아어 키보드 스티커 사든가 해야겠다.

 

Alexander Golovin, Portrait of Fyodor Shalyapin as Boris Godunov

 

 

Larisa Kirilova, Self Portrait

 

박물관에서 나와서는 예전에 도스토예프스키 집 박물관 갔다가 맛있게 먹었던 보르쉬가 생각나 도스토예프스카야 역으로 갔다. 역에서 나와서 자고로드니 대로를 따라 내려가면 있는 Shinok이라는 이름의 우크라이나 식당인데, 조그만 항아리 같이 생긴 그릇 위에 따뜻한 마늘빵이 덮여 있고 그걸 칼집내서 열면 맛있는 보르쉬가 담겨 있다. 여전히 맛있었다.

 

식당에 있는 중에 와이파이 쓰는데 블라디미르 아저씨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다음 날 마린스키 갈 예정이라니까 자기 형님이 2년 전에 마린스키 수리에 참여했었는데, 그때 돈이 사라져서 누명 뒤집어쓰고 감옥 갈 뻔 했다고, 러시아는 질서 없는 나라고, 카메라뿐 아니라 사람 자체가 실종될 수 있는 곳이니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다. 아저씨는 한국이 더 마음에 든다고 하시는데 이렇게 서로서로 자기 것이 아닌 걸 부러워 하나 보다. 지금 여기보다 어딘가 다른 곳을 바라게 되는 건 나뿐만이 아니구나.

 

이때 아저씨랑 이런저런 얘기를 해보니까 사할린 쿠릴 열도 출생이라 하셨다. 근데 벨고로드까지 온 가족이 이사갔다고. 아저씨 가족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쿠릴 열도에서 벨고로드로 옮겨갔단다. 정부에서 이주시키기도 했고 동네 사람들끼리 직접 이사한 경우도 있고. 벨고로드 위치 찾아보니 우크라이나 접경지대라서 우크라이나 얘기도 물어봤다. 가보셨냐고, 어떠냐고. 크림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의외로 우크라이나 땅이지 뭐, 하고 대답. 우크라이나 정권이 약해지면서 푸틴이 점령한 거라고. 나는 사실 러시아 입장도 이해 되고 우크라이나 쪽 입장도 수긍 된다고 하니까 네가 이제 러시아 여자가 다 되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 일갈-_- 그나저나 이때부터 아저씨가 자꾸 벨고로드 놀러오라고 하시는데 모르는 사람 믿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본인은 왜 계속 그러시는 거지 난처하게!!

 

저녁을 먹고는 애드미럴티 지하철역에 내려서 산책을 했다. 오랜만에 이삭 대성당도 보고 청동 기사상도 보고 그 앞에서 사진도 왕창 찍고. 원래 이번에 모스크바에서 주코프랑 성 게오르기 기마상을 찍고는 하도 흡족해서 표트르 대제 청동 기사상도 많이 찍어오려 했었다. 카메라 분실로 이 계획이 다 틀어지고 말자, 보상 심리로 열심히 셀카라도 찍었다. 나오기 전에 하도 기분이 꿀꿀해서 기분이나 좀 내보려고 모처럼 화장을 열심히 했는데 사진 찍을 때 도움이 되었다. -_- 이런 사진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이거라도...

 

저번에 왔을 때는 네바 강변을 따라 걸을 시간조차 없었다. 부지런히 다녔는데 어떻게 네바 강변 산책조차 못했던 거지? 대체 뭘 하느라 그렇게 바빴던 거지? 그리고 그땐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가볼 시간도 없었다. 이번에는 밤에 조용한 네바 강변을 따라 걷기도 하고, 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건너가는 다리들도 눈도장 찍어 두었다. 두 번째 오길 천만 다행이지. 그렇게 산책을 마치고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내려와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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