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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러시아

12/24 수(페테르부르크): 쿤스트카메라, 바실리예프스키 섬, 코반쉬나

bravebird 2014. 12. 28. 22:53

찬란한 날이었다. 한국에서 사간 사냥꾼 모자를 쓰고 나갔다. 카페 싱어에서 아침을 먹고 겨울 궁전을 지나 다리를 건너 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갔다. 가는 길에 눈 내린 풍경이 멋져서 또 엄청나게 프로필 사진용 셀카를 찍었다. 사실 러시아에서 사냥꾼 모자 쓰고 사진 찍는 게 오랜 꿈이었어서 원없이 그렇게 했다. 유빙이 떠다니는 네바 강은 어제 봤지만 그 다음날 봐도 아름다웠다. 또 엄청난 시간을 네바 강과 하늘 바라보는 데 보내고 오후가 되어서야 쿤스트카메라에 도착했다.

 

겨울궁전

 

네바 강의 유빙

 

쿤스트카메라

 

쿤스트카메라에서는 동양학 연구의 일환으로 탐험대를 파견하는 것 같았다. 내가 관심 있는 중국령 투르키스탄(신장)에도 비교적 최근에 탐험대를 파견해서 이런저런 사진 찍어 왔고 이런저런 볼거리도 마련해 놓았다. 예전에 에르미타주 갔을 때 중앙아시아 고고학 컬렉션이 방대해서 정말 깜짝 놀랐었다. 옛날에 투르판 베제클리크 석굴이나 둔황 막고굴 갔을 때 뜯겨서 없던 벽화들의 일부가 에르미타주에 떡하니 와있어서 퍼즐 맞추기 놀이 하는 느낌에 너무 설렜었다. 러시아는 스벤 헤딘, 오렐 스타인, 펠리오, 르콕, 오타니 등등이 투르키스탄 지역 불교유적들을 실컷 약탈해간 다음에서야 소규모 탐험대를 보냈다고 읽은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거리들이 꽤 많이 있었다. 그럼 르콕 컬렉션이 그렇게 기가 막히게 잘 돼있다는 베를린은 대체 어떻다는 말인지 상상이 안 간다!!

 

쿤스트카메라를 보고 나오니까 바로 옆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이 있던데 여기 동방학부가 유명하다고 익히 들었다. 박노자도 여기서 한국사 공부했고 알렉산드르 아저씨도 여기서 인도 문헌학 전공했다. 대학원 프로그램이 어떻게 돼있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여기서 석사 공부 할 수 있으면 관련 분야 연구 역사가 워낙 강한 곳이고 중요한 박물관도 도처에 있고 러시아어도 확실히 배우는데다 도시생활도 환상적일 텐데. 그야말로 완벽할 텐데!! 정말 바람이 빡 들어서 나중에 동방학부 프로그램을 살펴보니 한국에서는 제공되지 않는 학과 수업들이 많이 있었다. 카프카즈 지역학도 있고 티베트 문헌학도 있고 물론 몽골 관련 수업들도 있고. 갑자기 엄청 설렜다-_ㅠ

 

아 그리고 쿤스트카메라 하면 유명한 괴물들. 옛날 계몽주의 시대 사람들이 변태적인 취향이 있었는지 발생 중 기묘하게 변형된 사람이나 동물을 수집해서 박제해 놓았다. 헤르니아로 머리가 기묘하게 부푼 아기 괴물들, 눈이 하나뿐인 사이클롭스 아기, 샴 쌍둥이, 입술이 기묘하게 발달한 언청이(harelip), 하체가 인어처럼 발달한(sirenomelia) 아기들... 그리고 표트르 대제도 변태였는지 니콜라이 부르주아라는 이름의 프랑스 거인(키가 215~230cm 정도로 추정된다 함)을 사서 부하로 쓰고서는 그가 죽고 나자 뼈 모형을 쿤스트카메라에다 전시해 놨다. 아 정말 징그러운데 계속 보고 있는 나는 누구며 여기는 어디인가!

 

쿤스트카메라를 보고 나니 이미 시간이 꽤 되어 멘시코프성과 레릭 가족 박물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멘시코프성은 바로 옆에 있었고 레릭 가족 박물관은 저 멀리 내려가야 했다. 결국 후자를 택했는데 후회된다. 다 공사중인 데다 레릭 그림은 별로 없고 소장품이 거의 없었다. 사올 만한 화집 같은 것도 안 팔았다. 그나마 입장료가 무료여서 다행이었지 돈 내고 들어갔으면 억울할 뻔 했다. 멘시코프성은 이번에 꼭 가보고 싶었는데 결국 이번에도 그렇게 못 하게 됐다. 옛날 옛적 국제관계사개설 시험 볼 때 멘시코프 훈령 내용 쓰라는 문제가 나와서 학과 학생들 다같이 어이 상실했던 기억이 선하다. 멘시코프더러 hot russian guy라면서 교수님이 농담하는 바람에 내내 회자됐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뭐.

 

레릭 가족 박물관이 멀어서 오래 걸어가야 했던 대신, 가는 길에 예술 아카데미를 볼 수 있었다. 역시 시간이 안 돼서 안에는 들어가볼 수 없었지만 아카데미 앞을 지키고 있는 유명한 이집트산 스핑크스들은 포착해올 수 있었다. 여기서 레핀이 그림을 가르쳤고 이동파 화가들도 공부했었다는데 다음 번에 오면 안에 들어가봐야겠다.

 

예술아카데미 전경

 

예술아카데미 지붕 장식

 

예술아카데미 앞 스핑크스

 

예술아카데미 앞 스핑크스

 

발품 판 덕분에 뜻밖에도 베레샤긴이 공부하던 해군 학교까지 발견. 화가가 1년 공부하던 학교에까지 현판을 걸어놓다니. 150년 전의 화가를 잊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 존경스럽다. 이만하면 레릭 가족 박물관에서의 실망을 벌충하고도 남는 걸로 생각할 수 있겠다.

 

 

지하철을 타고 카잔스카야 거리로 돌아와서 Soup Vino라는 곳을 찾았다. 카잔스카야 거리 24번지에 있는 조그만 곳인데 마음에 쏙 들었다. 여기서 버섯 크림 수프랑 파스타 시켜 먹고 화이트와인 한 잔으로 마무리했는데 다 해서 단돈 2만원 들었다. 3년 전에는 환율이 40이었다는데 이번은 폭락해서 20이 되었기에 가능한 식사인 것 같다. 운이 좋았다. 

 

여기서 밥 먹는데 옆에 혼자 와서 와인 마시던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 May I have a seat here? 라고 말한 것을 듣고 러시아 사람 입장에서는 Can I? 가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면서 자기 머릿속에서는 можно가 can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셨다. 아 그런가보다 근데 난 차이를 잘 모르겠네 하고 귓등으로 들었지만 그래도 말 듣고 이번에는 Can I make an order? 하고 주문을 했. 밥 먹으면서 또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어져서 페테르부르크 주요 명소도 추천 받고, 아저씨 유럽 가본 이야기도 듣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베네치아와 파리와 암스테르담이 합쳐진 도시라는 말씀도 듣고, 예브게니 오네긴은 나보코프 영문 번역본을 꼭 읽어봐야 한다는 추천도 받고,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의견도 들어봤다. 아저씨 의견으로는 크림은 현재 전혀 위험하지 않고 러시아 치하에서 모든 것이 안전하며, 크림이 러시아에 속하는 것은 당연지사. 애초에 이 모든 사태의 본질은 우크라이나의 내부 분열인데 왜 서방에서는 러시아의 침략이라는 부분에만 그렇게 초점을 맞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밥 먹고 나서 마린스키로 향했다. 코반쉬나를 보는데 초장부터 엄청나게 졸았다. 자막 나오는 스크린이 가로로 길고 조그맣게 걸려 있는데, 안경 초점이 안 맞아서 고통스럽게 쳐다보다가 눈 아파서 졸고. 자막 안 봐도 내용 이해 잘 되는 작품이라는 말이 생각나서 자막 무시했더니 누가 누군지 분간이 안 돼서 졸고. 어떻게 해도 너무 졸린데 절대 끝이 안 나는 정말 긴 오페라였다. 그리고 무소르그스키가 정통으로 아카데믹하게 음악을 배운 게 아니라서 음악 스타일이 굉장히 독특하다고는 들었는데, 정말 그랬다. 나는 초심자라서 익숙한 차이코프스키 음악이 귀에 더 잘 들어왔다. 배경 이야기가 워낙 재밌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내리 졸아서 정말 안타까웠다. 다음에는 초점 잘 맞는 안경 끼고 와서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아, 특이한 점은 게르기예프가 처음부터 안 들어왔다는 점. 1막인지 2막 끝나고야 와서 지휘를 시작했던 게 특이사항이다. 지각인가? 뭐지? 백업 지휘자가 있다는 게 신기하네.

 

너무 졸아서 스토리를 놓치는 바람에 옆자리에 앉았던 브라질 사람이 갖고 있던 리플렛을 빌리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클래식 팬이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자주 온다고 한다. 이 정도의 가격에 이만큼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는 곳은 전세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밖에 없다면서. 나도 끄덕끄덕. 그렇지만 코반쉬나를 너무도 감동 깊게 보고 있는 클래식 매니아 옆에서 내리 졸고 있는 내 자신이 무척이나 작아 보였다. ☞☜

 

코반쉬나

 

코반쉬나. 표트르 대제의 등극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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