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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하리어A, 토하리어B 관련 발췌 본문

중점추진사업/내륙아시아

토하리어A, 토하리어B 관련 발췌

bravebird 2016. 5. 2. 00:24

발레리 한센의 《실크로드 - 7개의 도시》를 재밌게 읽고 곧 반납하기 직전이다. 정보가 꽉찬 책이라 뭐라도 메모를 좀 해놓고 싶다. 누란, 쿠차, 투르판, 사마르칸드, 장안, 둔황, 호탄 7개의 도시에 대한 저술인데, 그중 쿠차 챕터에서 토하리어에 대해 기존의 그 어느 책보다 자세히 나와있어서 베껴 적어둔다. 이 내용을 책 없이 스스로 읊을 수 있을 만큼 내공이 된다면 좋겠지만 아직 턱도 없으니, 일단 옮겨적고 사진을 좀 추가했다. 


***


  쿠마라지바는 재능이 특별히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여느 쿠차 주민들처럼 쿠마라지바도 여러 중앙아시아 언어에 정통했다. 쿠차어,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간다라어는 물론, 아마도 동부 토하리어(Agnean), 소그드어도 알았을 것이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니아의 이주민들과 마찬가지였다. 소그드어는 당시 사마르칸트 인근에서 주도적인 언어였고, 동부 토하리어는 언기(焉耆) 지역을 중심으로 실크로드 북로를 따라 퍼져 있었다. 언기는 쿠차에서 약 40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데, 언기는 중국식 지명이고 위구르어로는 카라샤르(Karashar)라 한다. 쿠마라지바와 그의 동료들은 브라흐미 문자를 이용해서 쿠차어와 산스크리트어를 쓰고 읽었다. 그들은 또한 카로슈티 문자도 공부했을 것이다. 카로슈티 문자는 기원후 400년경까지 사용되었다. (...) 전세계의 학자들은 쿠차어를 번역하느라 거의 100년의 시간을 소비하였다. 이들은 쿠차어 해독뿐만 아니라 동부 토하리어가 쿠차어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연구했다. 동부 토하리어는 쿠차어와 같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면서 쿠차어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쿠차의 키질 천불동 앞에 있는 구마라습(쿠마라지바) 동상. 수많은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했던 구자국(쿠차)의 승려였다. 이 키질 천불동의 벽화는 독일의 고고학자 알베르트 폰 르콕이 톱으로 도려내 갔고 그 중 많은 것이 세계대전 때 망가졌으며, 현재 베를린 달렘 박물관에 남아있다. 쿠차는 신장 여행 당시에 가려고 했다가 한파로 몸이 게을러져서 안 갔던 곳. 베를린 달렘 박물관에 간 것으로 아쉽게 대신했다.



(...) 오늘날 우리가 쿠차어라고 알고 있는 사라져버린 언어의 실마리는 1892년에 잡혔다. 그 해 카슈가르에 살고 있던 러시아 영사가 친숙한 브라흐미 문자로 기록된 고문서 하나를 사들였다. 학자들에게는 산스크리트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산스크리트어가 아니었다. 학자들은 몇 년 동안 그 고문서의 의미 해독에 전전긍긍했다. 이후로 같은 언어가 기록된 고문서가 몇몇 더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만 가지고는 연구 재료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문서는 대부분 목판에 글이 써 있는 낱장 문서로, 모두 서로 다른 텍스트의 일부분이다. 상업 문서도 있고 행정 문서도 있다. 게다가 대부분에는 날짜 표지가 없다. 

  그런데 1908년 두 명의 독일인 학자 에밀 지그(Emil Sieg)와 빌헬름 지글링(Wilhelm Siegling)이 미지의 언어를 해독해냈다. 그들은 옛날 어느 학교에서 산스크리트어와 미지의 언어를 단어 대 단어로 학습했던 이중언어 문서를 이용했다. 그들이 가진 문서 중에는 그 미지의 언어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문서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짤막한 간행기록(刊記, colophone)을 근거로 이름을 붙였다.(간기刊記란 어떤 텍스트에서 각 장의 제목이나 전체 텍스트의 제목, 저자나 옮겨 쓴 사람의 이름을 적어놓은 간행기록을 뜻한다. 간기에는 텍스트를 옮겨 적은 날짜가 기록되기도 하고, 옮겨 적는 비용을 제공한 기부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경우도 있다.)

  불교 텍스트의 제목은 <마이트레야사미티(Maitreyasamiti, 미륵보살을 만나다)>였고, 간기는 위구르어 혹은 고대 투르크어로 적혀 있었다. 위구르어는 투르크어의 일종으로, 현재 몽골에 속하는 초원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였다. 위구르인들은 9세기 중반에 타림 분지로 이주해왔었다. 간기에 의하면 그 텍스트는 "인도어"에서 "토그리(Twghry)어"로, 토그리어에서 다시 위구르어로 번역되었다. 지그와 지글링의 결론에 따르면, "토그리어"는 미지의 언어에 대한 위구르식 명칭임에 틀림이 없었다. <마이트레야사미티> 텍스트는 오직 위구르어와 새로 발견된 미지의 언어로만 존재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현명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우루무치 소재 신장위구르자치구 박물관에 소장된 마이트레야사미티. 브라흐미 문자로 쓰여있는 토하리A어(아그니어) 스크립트. 우루무치에 갔을 때 엄청난 혹한으로 게스트하우스에서 게으르게 지내다가 개관날짜를 잘못 확인하고 헛걸음 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다... 클릭하면 웹사이트 이동.



  지그와 지글링은 논의를 계속 밀고 나갔다. 토그리어는 토하리어를 위구르식 철자법으로 적은 것이다. 토하리어는 토하로이의 언어로서, 토하로이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박트리아 지역(아프가니스탄), 오늘날 파키스탄에 있는 도시 발흐 주변에 사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었다. 논의는 더욱 나아가 토하로이는 곧 월지(月氏, 月支)와 동일시되었다. 월지는 쿠샨 왕조를 수립한 민족들 중의 하나였다. 지그와 지글링은 중국의 전통적인 설명을 받아들여서 기원전 200년경 월지가 둘료 갈라져 소월지(小月支)는 감숙성 지역으로, 대월지(大月支)는 페르가나 계곡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지의 언어로 작성된 모든 문서들이 왜 유독 월지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감숙성 지역이나 그들이 정착했던 페르가나 계곡 지역(현 우즈베키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실크로드 북로에서만 발견되는지에 대해서는 지그와 지글링도 설명을 하지 못했다. 

  이후 주석가들은 왕조사에 기록된 월지에 대한 내용과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그 중의 한 의견에 따르면, 역사서에서는 월지의 고향이 돈황 지역이라고 나오지만, 사실은 그곳에만 한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신강과 감숙 지역 전역에 걸쳐 있었다. 다른 의견에 따르면, 월지가 감숙성 지역을 떠날 때는 토하리어를 사용했지만,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들어갔을 때는 이란어에 속하는 박트리아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월지의 후손들이 니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또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바로 간다라어로, 그것은 이란어가 아니라 인도어의 일종이었다. 이와 같은 모든 의견들은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월지의 이주와 토하리어라는 명칭의 정확성에 대해서 더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1938년에 헤닝(Henning, W.B.)은 토그리에 대해서 보다 설득력 있는 새로운 설명을 제시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네 개의 토그리"(Four Twghry, 때로는 어미 y가 탈락됨)라는 어휘였다. 이 어휘는 소그드어, 중세 페르시아어, 위구르어 고문서 중에 겨우 몇 차례 등장했는데, 9세기 초에 쓰여진 것들이다. "네 개의 토그리"라는 어휘는 쿠차를 제외한 북정(北庭, 위구르의 베슈발릭), 투르판, 언기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헤닝의 주장에 따르면 북정에서 서로는 언기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처음에는 투르판과 북정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언기에서도 사라졌다. 궁극적으로 그곳에서 토그리어를 대체한 것은 위구르어였는데, 오늘날까지 신강 전지역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 헤닝의 주장은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했지만 토그리어 고문서의 지리적 분포를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사실 월지는 공식적으로는 박트리아어를 사용했다. 박트리아어는 이란어에 속하며 그리스 문자를 이용해서 표기했다. 그렇다면 토하리어라는 명칭은 잘못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토하리스탄 거주자들이 쿠차 지역에서 발견된 고문서에 적혀 있는 것과 같은 토하리어를 사용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지그와 지글링이 토그리어와 아프가니스탄의 토하로이 민족을 결부시킨 것은 잘못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언어에 붙여진 토하리어라는 명칭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

  지그와 지글링은 남아 있는 문서들을 토하리어A와 토하리어B라고 하는 두 개의 방언으로 구분했다. 두 개의 언어는 모두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들이다. 산스크리트어처럼 두 개의 언어는 모두 어미변화가 심한 언어들이다. 동사와 명사는 각 문장에서 담당하는 기능에 따라 어미 변화가 이루어진다. 토하리어A와 토하리어B에는 공통 어휘가 많다. 이는 두 언어가 알려지지 않은 어떤 하나의 언어로부터 파생되어 나왔음을 의미한다.

  유명한 미국의 언어학자 레인(Georgy Sherman Lane)의 주장에 의하면, 두 개의 언어는 워낙 차이가 심해서 각각 천여 년, 최소한 500년 이상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을 것으로 추정되다고 한다. 토하리어A와 토하리어B는 사실상 꽤 다른 언어이다. 마치 현대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의 차이와 같아서 한 언어 사용자가 다른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이다.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토하리어B(쿠차어) 스크립트. 역시 브라흐미 문자로 쓰여있다.



  이 두 개의 언어가 사용된 지역(타클라마칸 사막 북로)을 감안해 볼 때, 두 개의 토하리어가 모두 인접한 이란과 인도 지역에서 사용된 인도-이란어(인도유럽어의 일종)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은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개의 토하리어는 사실상 이란어나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독일어, 그리스어, 라틴어, 켈트어와 공통점이 많다고 판명되었다. 아이다호 대학교 영문과 교수인 더글라스 아담스(Douglas Q. Adams)의 주장에 의하면, "토하리어와 독일어, 그리스어 등의 관계를 근거로 볼 때 토하리어를 지리적으로 원시 인도유럽어권에, 말하자면 게르만어(북쪽?)와 그리스어(남쪽?)의 사이 어디쯤에 위치시킬 수 있다." 아담스의 매혹적인 논의에 따르면, 먼 옛날, 아마도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000년 사이, 토하리어A와 토하리어B의 모체가 되는 어떤 언어가 원시인도유럽어에서 떨어져 나왔고, 그 시기는 게르만어 사용자와 그리스어 사용자가 원시인도유럽어 사용자로부터 분리되던 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인의 이주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언어를 근거로 이주를 재구성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토하리어 사용자들이 타림 분지로 들어오기 전에 어디에서 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토하리어A 및 토하리어B와 비슷한 또 다른 인도유럽어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사용되었지만 남겨진 자료가 없을 뿐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은, 중앙아시아에서 살았던 민족들은 언제나 이동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언어는 결과적으로 자주 바뀌었을 것이다. 중국어 자료에는 수많은 민족들이 연이어서 이동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2세기에는 흉노의 팽창 때문에, 6세기에는 투르크(중국어 자료에서는 돌궐이라고 하는데, 현재 터키 투르크족의 선조이다.)의 번성 때문에, 그리고 9세기에는 위구르(투르크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의 신강 이주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민족 이동이 충분히 발생했을 수 있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언어의 연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단절이 당연한 일이었다. 

  지그와 지글링 이후 언어학자들은 토하리어A(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그니어Agnean)와 토하리어B(요즘은 쿠차어라고 함)라고 하는 두 언어의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밝혀냈다. 2007년 오스트리아 과학원의 학자 멜라니 말잔(Melanie Malzahn)은 아그니어로 작성된 모든 고문서를 조사했다. 모든 목판 고문서와 파편을 합쳐서 수를 세어보니 1,150건이었다. 완전한 형태의 목판 고문서는 모두 합해서 50건을 넘지 못했다. 

  아그니어 고문서 중에서 383건은 언기의 남서쪽 코를라 가는 길에 있는 쇼르츄크(Shorchuk, 七個星佛寺遺址)의 어느 문서고에서 발굴되었다. 어느 문서에서도 언어의 명칭 그 자체가 기록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산스크리트어로는 도시 이름이 아그니Agni) 근처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언어를 아그니어(Agnean)라 칭한다. 이후로는 이 책에서도 아그니어로 지칭하기로 한다. 남아 있는 고문서들을 실마리로 삼아 추론해 보건대, 언기(아그니)와 투르판 거주자들은 기원후 1세기경에는 아그니어를 썼을 것이다. 당시는 서쪽에 살던 이란어 사용자들이 불교의 가르침을 처음 전해주었을 무렵이다.



신장위구르자치구 언기 인근의 쇼르츄크 유적 전경



  (...) 독일인들이 투르판 바로 외곽에 있는 승금구(勝金口, Sangim)에서 발견한 고문서는 두 개의 토하리어의 서로 다른 쓰임새를 명백하게 설명해 준다. 텍스트는 아그니어로 쓰여 있고, 19개의 주석은 쿠차어, 두 개는 위구르어로 쓰여 있다. 레인(Lane)이 설명한 바와 같이, "아주 명백한 사실은 우리가 토하리어A(아그니어)로 쓰인 텍스트의 주석서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새롭게 이주해 온 사람이 주석을 달았는데, 그가 사원에서 사용하던 언어는 최소한 토하리어B(쿠차어)였고, 그로서는 '옛날'에 쓰던 사원의 언어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의 모국어는 아마도 투르크어(위구르어)였을 것이다." 6세기에서 7세기와 8세기를 거치면서 아그니어는 오직 글로만 남게 되었고, 사원 내에서 불교 승려만이 사용하는 언어가 되었다. 사원 바깥에서 언기와 투르판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어와 위구르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투르판 인근의 승금구 석굴. 바로 뒤의 배경이 이글거리는 불길처럼 생긴 화염산이다. 정말 그렇게 생겼다. 여름 기온이 60도에 육박한다는 투르판이라 더 그렇다. 서유기에도 나오는 유명한 산이다.



  쿠차어와 아그니어는 중요한 지점에서 서로 달랐다. 쿠차어에는 지역별 차이가 존재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오래도록 사용되면서 생겨난 차이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변화의 단계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즉 고대 쿠차어, 고전 쿠차어, 후기 쿠차어, 구어체 쿠차어가 있었다. 1989년에 주도적인 토하리어 연구자였던 프랑스 학자 죠르쥬-쟝-피노(Georges-Jean Pineau)는 쿠차어 고문서가 모두 3,120점이라고 계산한 바 있다. 그 뒤로 베를린에서 입수한 자료를 더해서 통계는 6,060점까지 올라갔다. 아직도 조사하지 못한 목판이 200점이 채 못 되게 남아 있다.

  20세기 초 폴 펠리오는 이 중 2천여 점의 목판을 수집했다. 대부분은 쿠차 남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둘두르 아쿠르(Duldur Aqur)에 있는 사원 인접 지역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아그니어 텍스트와 달리 이들 텍스트에는 사용된 언어의 명칭이 나와 있었는데, 바로 쿠차어였다. 쿠차어는 보다 넓은 지역에서 사용되었고, 그 지역들은 모두 타클라마칸 북로를 따라 분포하고 있었다. 핵심 지역은 쿠차였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투르판까지 뻗어 있었고, 아그니어의 핵심 지역인 언기와도 지리적 범위가 겹쳤다.

  중국어와 쿠차어 자료 중 상당수는 하나의 도서실에서 나왔다. 펠리오의 노트에 의하면, 도서실의 벽은 이미 무너진 채로 유물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불이 나서 문서들이 많이 훼손되었다. 펠리오가 한 장소에서 모든 문서를 발굴한 것은 아니었다. 종교 관련 문서는 사원 안에 있는 성소나 탑에서 발굴했고, 행정 관련 문서들은 사원 가장자리에서 찾았다.

  5세기 말에 이르면, 쿠차의 주민들은 쿠차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당시 중앙아시아는 특히 유동적인 시대로 접어들었다. 다양한 민족 연맹체들이 주요 무역로를 두고 우열을 다투었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유연(柔然, 중국식 명칭. 혹은 예예芮芮로도 일컬어짐. 유럽에서는 아바르Avars로 알려짐)과 에프탈(Ephthalites)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바르 연맹은 쿠차와 언기를 정복한 뒤 분열되었고, 곧이어 552년에는 투르크(Turks, 중국식으로는 돌궐突厥)가 이들을 대체하여 지역 통치자는 그대로 둔 채로 쿠차와 언기를 아우르는 새로운 맹주가 되었다. 552년 이후 투르크 연맹을 수립했던 지도자의 형제가 서방을 향한 군사 원정에 성공을 거듭해서 신강 지역의 일부와 흑해에 이르는 통로 지역을 정복했다. 두 형제는 마침내 두 개의 카간국으로 갈라져서, 연맹을 수립했던 지도자가 동부를, 그의 형제가 서부를 지배하는 동시에, 서부가 동부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관계는 점점 형식적인 관계로 변했고, 580년에 이르러서는 동부 카간국과 서부 카간국이 분명하게 나뉘어지는 모양새가 되었다. 서부 카간을 주군으로 인정한 쿠차의 통치자들은 그들에게 조공을 바쳤고, 요청이 있을 경우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6세기에서 8세기에 이르기까지 백씨 가문은 계속해서 쿠차를 다스리며 왕좌를 유지했다. 이는 중국의 공식 역사서에서도 확인되는 바와 같다. 중국의 사료에서는 흔히 과거의 역사 기술을 그대로 따라 쓰기도 했지만, 어쨌든 쿠차 왕국이 부유했고 중국에 값비싼 진상품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

  6세기에서 8세기까지 쿠차어는 사원의 회계나 왕의 명령서, 연대기를 기록한 역사 자료, 여행자들의 낙서, 사원에 헌납한 물품 기록 등에 공식적으로 사용된 살아 있는 언어였다. 더욱이 불교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작가들도 쿠차어를 사용했다. (...) 차어는 아그니어가 대체로 소멸한 이후에도 널리 사용되었지만 기원후 800년 이후에는 쿠차어 또한 실질적인 사용에서는 멀어지고 말았다.


발레리 한센, 《실크로드 - 7개의 도시》, 제2장 쿠차 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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