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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점추진사업/내륙아시아

도쿄 출장길의 오타니 컬렉션 (2)

bravebird 2016. 12. 20. 15:24

출장 첫날 회식에서 또라이한테 걸려서 아까운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했다. 다음날은 반드시 내 뜻대로(!) 활용하겠다는 각오로 유카타를 입고 잠들었다. (회식 때문에 온천을 못했으니 잠옷으로라도 쓰자...) 다행히 도쿄국립박물관 위치는 기가 막히게 절묘했다. 도쿄 명소인 우에노 공원 안에 있는데, 나리타 공항 가는 스카이라이너 정거장이 바로 근처의 게이세이 우에노 역이다. 첫날부터 이 절묘한 위치를 살살 어필하면서 밑밥을 깐 덕분에 3명의 일행 모두는 우에노 공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음하하!! 


선배 한 분은 공원을 돌아보기로, 다른 한 분은 박물관에 같이 가겠다고 하셨다. 혹시나 박물관 구경이 좀 길어지거나 하더라도 눈치가 덜 보이게끔 입장권을 사서 건네 드렸다. 이것도 요즘 연습 중인 협상기술의 일환.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


도쿄국립박물관 동양관은 이렇게 깔끔하고 빤질빤질하게 생겼다. 2층에 서역 미술과 간다라 미술 전시실이 있다. 오타니 컬렉션은 바로 이 서역 미술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상설전시에 속하는데 홈페이지에 11/1~12/18이라고 기간 표시가 돼있는 걸 보면 전시품 로테이션이 활발한 모양이다이곳에서 제일 기대했던 건 신장 미란에서 출토된 날개 달린 천사 프레스코 파편이다. (2016/05/01 - [중점추진사업/유라시아사] - 오렐 스타인과 크로라이나(누란) 왕국) 이건 내가 갔을 땐 없었고, 아마 수장고에서 푹 쉬고 있는 모양이지. 




요렇게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도장들이 많았다. 그 중에 단연 눈에 띄는 날개달린 말.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호탄의 요트칸 고성에서 출토된 4-5세기의 유물로, 오타니 컬렉션에 포함돼 있다. 나는 걸을 때 달그닥 달그닥 소리가 나서 아버지가 발소리만 듣고도 내가 집에 오는 줄 아신다. 말발굽 소리 난다며. ㅋㅋㅋㅋ


요트칸은 고대 서역 36국 중 하나였던 호탄국의 도성이 있었던 곳이다. 호탄은 티베트와 신장 사이에 있는 쿤룬산맥의 북변이자 타림 분지의 남변에 있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행정구역이다. 쿤룬 산맥에서 발원한 카라카쉬강에서 예로부터 옥이 많이 발견되어 옥의 주산지로 불렸다. 사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호탄의 옛날 이름은 우전(于闐)이었고 우전 하면 옥이었다.


티베트와도 인도와도 가까운 위치 덕분에 고대에 불교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특히 대승불교가 융성했다. 기후조건도 좋아서 풍요를 구가했다. 당나라 구도승인 법현과 현장이 이곳을 지나갔을 때 모두 그 풍족함을 언급했을 정도다.


고대 호탄 주민은 아리아 계통으로 추정되며, 그 언어는 인도 유럽어족의 이란어계에 속했지만 문화나 종교 방면에서는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문자 역시 인도 브라흐미 문자의 일종인데, 동이란계 사카어(Saka Language)를 연구하던 호주 출신의 해럴드 월터 베일리(Harold Walter Bailey)가 해독해 냈다. 이슬람화된 카라한 왕조가 1006년도에 호탄을 정복하면서 무슬림 통치가 시작되고 불교문화가 단절되고 만다. 11세기 말에는 언어 역시 투르크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마르코 폴로가 13세기에 호탄을 방문했을 때는 이미 무슬림 도시였다.




눈꼽만한 아기 토용. 마찬가지로 호탄 요트칸 고성에서 나온 유물이다. 원숭이를 많이 닮았는데, 실제로 이 지역에서는 원숭이를 의인화한 테라코타 인형들이 많이 발견됐다. 여섯번째 녀석은 세번째 다리(!)가 보이네.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답게 헤라클레스쯤 나와줘야지. 현대 중국의 오지 중 오지에서 이미 2-4세기에 헤라클레스 조상이 만들어졌다니 인류의 근성은 위대하다.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고 사막 헤쳐서 동방에 도착한 헤라클라스. 이렇게 주로 호탄 요트칸 지역의 유물로 구성된 전시품을 보고 나서 안쪽으로 이동하니 오타니 탐험대에 대한 간략 지도와 설명이 붙어 있었다.



오타니 탐험대는 교토 니시혼간지 제22세 문주인 오타니 고즈이의 명을 받고 1902년부터 1914년 사이에 3번에 걸쳐 서역에 파견되었습니다. 서역이란 중국의 서쪽, 현재의 중앙아시아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정치적 의도나 고고학·문화인류학적 탐구를 위해 서역 조사에 나섰는데 비하여 오타니 탐험대를 움직이게 한 것은 불교가 번성한 서역에 대한 동경심과 불교에 대한 진지한 자세였습니다. 그들은 불교가 일본에 전래된 길을 따라가면서 유적 조사, 유물 수집을 수행함으로써 불교의 역사나 문화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타니 탐험대가 남긴 각종 기록이나 그들이 발견해 일본에 가져온 목간과 고문서, 벽화, 조소, 직물 등 방대한 수집품들은 불교의 역사와 각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귀중한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도쿄국립박물관 오타니 컬렉션 소개글 중)


서양의 중앙아시아 탐험은 정치적 의도에 기반한 것으로, 오타니의 탐험은 순수한 종교적 열정으로 묘사했다. 오타니가 불교에 열정이 있었을지라도 이 사람이 활동하던 시기 자체가 제국주의적인 욕망으로 불타오르던 시대였기에 오타니 컬렉션 역시 그 불길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실제로 오타니는 재정난에 처하자 많은 서역 유물을 일본 재벌 구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에게 헐값에 팔아넘겼다. 구하라는 이것을 동향 친구이자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기증해서 그 대가로 광산 채굴권을 받아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구하라 기증품이 일본 패망 후 조선에 잔류하면서 서울을 뺏고 뺏겼던 한국전쟁, 부산 피난 등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관 중앙아시아실 소장작이 된 것이다.


구하라 후사노스케


구하라 광업은 실제로 평안북도에서 광산을 인수하여 채굴을 했고, 이 광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구리 가격이 폭등하면서 많은 이윤을 남겼다. 구하라는 이후 만주국으로도 진출하여 만주중공업개발을 운영했는데 이 명칭이 닛산 콘체른으로 바뀌었고 이것이 바로 일본 재벌의 하나인 닛산의 전신이다. 구하라는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태평양 전쟁 때 여러 활동을 벌였다.


오타니는 이후 서울과 뤼순을 거쳐 중국,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포교 활동을 했다. 특히 그는 1920년에 인도네시아 자바섬 등 동남아 여러 지역에서 커피와 고무 농장을 구입하고 일본인을 이주시켜 플랜테이션을 운영하는 한편 정토진종 포교를 계속했다. 그의 서역 탐험이 종교적 열정에 기반한 것일지라도, 그 자신과 주변 사람의 행적을 보았을 때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로웠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서양과 대립되는 동양이라는 개념을 창조하고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미명 하에 아시아를 정복하고 침탈했던 일본 제국주의를 종교적·문화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작가 마츠오카 유즈루를 위시한 당대 지식인들은 오타니의 치적에 열광하면서, 위에 인용한 도쿄국립박물관 설명글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세계관을 보여주었다. (2016/11/30 - [중점추진사업/유라시아사] - 도쿄 출장길의 오타니 컬렉션 (1))


수집한 유물을 싣고 내몽골 사막을 지나는 오타니 3차 탐험대. 1914년 3월.


여기에다 간다라 전시실 불상까지 다 보고 나니 계획했던 만큼인 1시간 정도가 지났다. 다행히 같이 간 선배님도 크게 지루해하지 않으셨고, 조금 곁들여 드린 설명도 재미있게 들어주셨다. 나와서 우에노 공원을 천천히 산책하다가 게이세이 우에노 역에서 나머지 한 선배님을 만나 공항 도착, 이내 서울에 돌아와서 개운하게 푹 잤다. 다만 그로부터 며칠 지나서, 그 노답 꼰대 아재의 동료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연락을 해왔길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차단하였다는 후문이 있다. 으으으 제발 그만하자....


1박 2일로 극히 짧고 소정의 괴로움도 있었지만(!?) 목표한 것은 순조롭게 다 해낸 출장이었다. 올해 특히 열심이었던 실크로드 문화재 테마여행(스벤 헤딘의 스톡홀름 - 올덴부르그의 상트페테르부르크 - 오렐 스타인의 런던 - 폴 펠리오의 파리 - 국립중앙박물관 아프가니스탄 특별전)의 명백한 연장선상에 있는 도쿄출장 기회가 내게 온 것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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