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 목(페테르부르크): 음반점, 극장 옆자리 사람, 에르미타주, 분신

전날 들어가보지 못한 예술아카데미와 멘시코프성을 들어가보려고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겨울궁전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우연히 악보와 CD를 파는 상점을 발견하고는 안에 들어갔더니 클래식 음반이 그득했다. 예브게니 오네긴 DVD나 CD를 사올 생각이었지만 마린스키 음반가게에서 못 구했기에 반갑게 집어 들었다. 조금 더 구경했더니 욕심나는 음반들이 많이 있었다. 가격을 살펴보고 부담없이 다 사왔다. 가격 자체가 한국 CD보다 저렴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환율이 반토막 난 덕분. 한 번도 CD 5장을 한꺼번에 산 적은 없었다.

 

 

1. 안톤 루빈슈타인 - 악마  2. 차이코프스키 - 마제파

3. 차이코프스키 - 예브게니 오네긴  4.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 앨범  5. 미콜라 리센코 - 타라스 불바

 

이 중에 예브게니 오네긴 빼고 실제 오페라를 감상해본 것은 없다. 오네긴이야 워낙 좋아하니까 샀고, 나머지 오페라 레퍼토리들은 원작을 재밌게 읽었거나 혹은 앞으로 읽어볼 계획인 것들이라 사왔다. 읽으면서 배경음악으로 틀어놓아야지.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는 2007년 메트 오페라 버전 보다가 반해서!

 

 

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넘어가기 전에 눈 덮인 아름다운 모이카 강 앞에 멈춰 서서 한 장 사진으로 남겨 왔다. 이 바로 위에 있는 문학카페에 들러 푸쉬킨이 마셨다는 레몬에이드를 맛볼 계획이었는데 문이 닫겨 있어서 다시 모이카 강으로. 그런데 이때 낯익은 얼굴의 한 남자가 완전히 입을 벌리고 거의 취한 표정으로 모이카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표정. 전날 코반쉬나 볼 때 옆자리에 앉았던 브라질 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자리를 떠서 외투를 돌려받을 때 헤어지는 바람에 인사를 못 드려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게 되다니! 결국 여기서 서로 사진 찍어 주고서 근처에 아침을 같이 먹으러 갔다.

 

이 분은 알렉산드레 슈미트. 독일 혈통이 있는 브라질 분이었다. 경제학이랑 법학을 공부하고서 금융 필드에서 돈을 벌어 가지고 대학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철학과 심리학과 또 무엇인가 잘 기억이 안 나는 하여튼 무엇인가를 공부하고서 지금은 심리학 쪽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공부가 너무 재밌어서 몇 개씩 학위를 따는 분. 르네상스인 같은. 휴가도 워낙 긴데 방학까지 있다 보니 올 한 해 동안 러시아에만 5번 왔다고 한다. 올 때마다 볼쇼이와 마린스키 플레이빌을 철저히 확인해서 매일매일 공연을 챙겨본다고 했다. 제일 부러운, 절대 발끝에도 미칠 수 없는 삶이네.

 

예술아카데미에 가 볼거라고 했더니 바깥에서 스핑크스 봤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안에 들어가볼 가치는 별로 없다고 했다. 대신 에르미타주 General Staff 빌딩에 가서 그림 보자고 했다. 에르미타주는 전혀 계획에 없었고, Francis Bacon이라는 아일랜드 현대화가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다 현대미술은 그다지 취향이 아니어서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따라갔다. 이게 신의 한수였다.

 

저번에 왔을 때 못 봐서 영 찜찜했던 앙리 마티스의 춤과 음악 시리즈가 여기에 와있을 줄이야! 여기 꽁꽁 숨어 있었네!

 

 

 

르네 마그리트의 요 녀석도 여기 와있고.

 

 

이외에도 수많은 미술 작품들과 황제의 물건들과 황실의 온갖 소장품들을 공짜로 몇 시간 동안이나 볼 수 있었다. 예술아카데미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었고 따라가길 잘했다. 나와서는 눈 내리는, 물 만난 물고기 같은 겨울 궁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이미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문학카페는 파티 준비로 또 닫혀 있어서 30분이나 기다려야 했기에 카페 싱어에서 저녁을 먹고서 사진을 찍으러 나갔다. 그리보예도프 운하에서 피의 성당을 배경으로, 예술 광장에서 푸쉬킨과 함께, 네프스키 대로에서, 그리고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앞에서. 실컷 사진을 찍고서 내 사진은 메일로 보내주기로 약속하셨다. 알렉산드레는 호두까기 인형 보러 갈 시간이 다 되어 마린스키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고, 나는 그 길로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 들어가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 연극 당일 저녁 표를 예매했다. 400루블짜리 자리.

 

자막이 없어 물론 하나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불안한 수다쟁이가 쉴새없이 지껄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만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소설 자체도 그랬지만 연극 역시 원작을 실험적으로 해석해서 정신이 분열될 것 같고 기이하고 신나는 분위기를 잘 담고 있었다. 내 자리는 무대에서 보았을 때 좌측 2층 제일 한구석 앞줄 자리였는데, 그냥 앉아 있으면 무대가 전혀 안 보이는 수준이었다. 앞에 난간에 기대서 목을 빼고 내려다보아야만 했다. 그런 자리가 지금 환율로 8000원 정도인 걸로 감을 잡았다. 극장 내부는 무슨 옛날에 미미인형 쥬쥬인형 집처럼 동그마니 아기자기한 그렇지만 웅장한 모습이었다.

 

 

 

 

연극을 보고 나와서는 전날 갔던 Soup Vino로 돌아갔다. 늦은 시간이어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전날 좋은 와인을 추천해줬던 직원이 그대로 있었다. 나는 차분하고 온화한 미소를 띤 사람을 참 좋아하는데 이 분이 딱 이상적으로 그랬다. 사람도 없고 해서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 보니 오로라가 보이는 북쪽 지방에서 왔다고 한다. 어제 왔을 때 이상한 아저씨가 자꾸 말 시켜서 난처했을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고, 아니라고 나는 오히려 말동무가 있어 재밌었다고 대답했다. 내가 이 작은 식당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추천해준 와인이 얼마나 좋았는지, 이 아름다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기가 얼마나 아쉬운지 이야기하고서 내년 백야 시즌에 꼭 돌아올 테니 기억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선량한 미소와 차분한 목소리로 빛나는 그의 이름은 알렉세이. 나도 그런 담담한 웃음이 어린 태도를 갖고 싶다. 그야말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인 것을 알지만 한번쯤 꺼내어 추억해보면 훈훈한 그런 사람일 것 같다. 다음 번에 돌아가면 환상 깨지는 거 아니야 이거? 일부러 안 가야 되나? ㅋㅋㅋ

 

 

천천히 밥을 먹고서 숙소로 돌아가 온통 더러워진 신발을 씻었다. 다시 짐을 주섬주섬 챙겨 체크아웃했다. 가스찌니 드보르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카잔 성당의 야경을 바라보며 작별 인사를. 그리고서 봉기 광장에 있는 모스크바 기차역에서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다시 모스크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