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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러시아는 어디로 가는가 - 우크라이나 및 크림 사태 본문

독서

2014 러시아는 어디로 가는가 - 우크라이나 및 크림 사태

bravebird 2015. 1. 10. 23:02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소득 중에 하나가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우크라이나 및 크림 사태의 주요 측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최근 우크라이나 국내 정치의 파시즘 경향이다. 스바보다(자유) 당과 프라비 섹토르 등의 단체는 친서방과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있으며 이는 표면상 유로마이단의 지향점과 동일하다. 그러나 실상 이들은 공공연히 나치 계승을 표방하는 파시즘 단체로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더욱 복잡 다단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은 유로마이단 운동에 대한 언론의 관심에 편승하기 위해 시위 속에 섞여 들었다.

 

여기서 반드시 유의해야 할 것이, 극우 세력의 이러한 틈입으로 인해 러시아 언론은 유로마이단의 본래 취지까지 파시즘으로 싸잡은 정치적 프레임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푸틴 정권은 유로마이단 운동을 파시즘 세력의 준동으로 몰아감으로써, 나치 독일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러시아 국민들의 애국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푸틴은 이러한 방법으로 우크라이나 내정 개입을 정당화하며 강한 러시아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를 만족시키고 자신의 지지도를 끌어올렸다.

 

정리하자면, 파시스트적 실질을 자유 및 민주주의라는 구호로 위장한 세력과(프라비 섹토르, 스바보다 당), 민주주의적 본래 취지를 파시즘이라는 선전으로 호도당한 축(유로마이단)이라는 서로 정반대의 두 아이러니가 파시즘이라는 한 기호에 붙잡혀 있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자의적 연결이 빚어내는 혼돈 그 자체다. 기호는 기호일 뿐이구나. 정치란 결국, 똑같은 기호를 누가 어떻게 낚아채서 무슨 의미를 먼저 갖다 붙이는지의 문제였던 것이다.

 

실질적 기의로서의 파시즘이건 텅 빈 기표로서의 파시즘이건, 우크라이나 사태에서의 파시즘이라는 팩터 자체가 국내 언론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서방을 위시한 세계 언론 역시 현 사태를 자유, 민주주의, 서구 vs 제국주의, 신냉전, 러시아라는 이분법적인 국제정치 구도로 환원시키고 있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의 혹독한 전쟁을 경험한 러시아에서는 우크라이나의 파시즘 경향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 상당히 강력한 정치적 명분이자 선전 문구로 쓰이고 있다. 크림 반도의 주민 투표 때도 "파시즘에 맞서 올바르게 투표합시다(=러시아 귀속을 지지합시다)"가 주요한 구호였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바라보는 데 있어 우리와는 달리 파시즘이라는 언술이 매우 핵심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지에 나가 부딪쳐 보아야 체감할 수 있는 그곳만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고, 같은 사태라도 입장에 따라 각국 언론이 완전히 다른 부분을 조명하고 부각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실제로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도 커다란 입장 차이가 있었다. 이미 다른 글들에서 다룬 내용이므로 접어서 표시.

 

더보기

 

알렉산드르

-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15년 이상 일하고 공부한 힌디어 학자, 현재는 사정상 모스크바의 한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으며 인도로 돌아가서 평생 살고자 함.

- "갑자기 가만 앉아 크림을 빼앗긴 우크라이나 정부의 화나는 심정 자체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하나나 다름없다. 형제끼리 다투게 된 것이 마음 아프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고골과 톨스토이의 언어를 배척해야만 하는 지금의 현실은 굉장히 통탄할 일이다. 우크라이나 국내정치가 파시즘 단체에 영향 받고 있는 것도 매우 우려스럽다."

 

 

 

블라디미르

-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있는 벨고로드 출신의 선박 수리 기술자, 우크라이나 왕래가 잦았음, 부산에 20년 이상 거주하다가 1년 정도 잠깐 벨고로드에 돌아가며, 러시아보다는 한국이 훨씬 질서 있고 살기 좋다고 생각함.

- "크림은 우크라이나 땅이다. 우크라이나 정권이 약해진 틈을 타서 푸틴이 점령한 것. 지금 크림은 여행하기에는 위험하다."

 

 

 

세르게이

- 상트페테르부르크 거주, 40대 후반의 고학력 직장인으로 추정되며 엘리트 문화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을 동경하며 유럽 여행이 잦음.

- "지금 크림은 러시아 치하에서 안전하다. 여행하러 간다 해도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 애초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다른 부분에는 관심이 없는데, 다만 크림만은 러시아 것이다. 크림은 이제 정리가 되었으니 러시아는 러시아끼리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끼리 잘 살면 된다. 우크라이나 안에서의 내분이 본질인데 왜 다른 나라들은 자꾸 러시아를 물고 늘어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여행을 다녀와서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에서 매해 발간하는 러시아 관련 시사 칼럼집 제 5권인 《2014 러시아는 어디로 가는가》를 읽었다. 러시아 정치와 외교, 정책, 러시아와 한반도 관계, 경제, 중앙아시아, 소치 동계올림픽, 러시아 사회문화, 역사 연구 등 러시아의 다방면에 관련된 유익한 칼럼이 여럿 수록되어 있어 한 해의 사건들을 정리하며 읽기 좋았다. 가장 흥미로웠고 도움을 많이 받았던 우크라이나 관련 부분을 가필을 포함하여 메모해 놓는다.

 

 

1. 우크라이나의 서방 정향과 동방 정향

 

 

 서방 정향

동방 정향

내용

EU 가입

러시아 주도 관세동맹(유라시아연합, EAU) 가입

+

유럽 단일시장 접근, 선진 기술 습득의 기회

가입 조건 등 요구사항이 적은 편

-

가입 조건을 충족을 위한 정책 개혁에 따르는 부담

정치, 경제적 의존도 심화로 인한 안보 위협의 증가

 

 

2. 유로마이단 운동과 우크라이나 사태

 

- 13년 11월 12일 야누코비치 정부가 EU와의 FTA 체결을 연기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 시위로부터 시작. 키예프 유로마이단 광장은 2004년 오렌지 혁명의 현장이기도 함. 당시에도 야누코비치는 규탄의 대상.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2004년 총리 재직 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부정 선거 의혹으로 인해 야기된 오렌지 혁명 이후 재선거에서 야권 후보인 유셴코에게 패배. 이후 2010년 재출마하여 5년 임기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중, EU와의 FTA 추진을 백지화한 것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로 인해 인권침해 및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2014년 2월 22일 탄핵됨. 현재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재벌 정치인 출신으로서 '우크라이나의 유럽화'를 공약으로 하였던 페트로 포로셴코. 이후 14년 3월 16일 크림 반도에서 주민 투표를 통해 크림의 러시아 귀속이 결정됨.

 

- 우크라이나는 지난 4년간 EU와의 FTA 타결을 위해 정치, 경제 분야에서 EU의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수용하고 제도를 개혁하는 등 노력해 왔으나, 마지막 조건으로 율리야 티모셴코의 석방만을 남겨두고 있었음. 티모셴코는 EU의 지지를 받는 대선 후보가 되어 2015년 차기 선거에서 야누코비치의 강력한 경쟁 상대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었음. 또한 EU와 협상할 경우 러시아의 제재조치 강화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 예상되며, 이것이 야누코비치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리스크 또한 존재. 애초에 야누코비치의 정치적 성향 자체가 친러시아적이었으며, 정치 기반 역시 친러시아 색채가 짙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모든 상황을 고려하였을 때, 야누코비치는 진심으로 EU와 FTA를 체결하려고 했다기보다는 이를 카드로써 러시아로부터 유리한 협상안을 얻고자 한 것으로 추정.

 

- 탄핵 원인에 대하여, 우크라이나 서부 거주 시민들은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의 부패를 원인으로 보는 반면, 동부 시민 다수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이용하려는 서방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 흥미로운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모두 우크라이나 사태의 심화 원인이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그의 정부에 있다고 보며, 양국 국민 모두 우크라이나 사태와 러시아의 연관성 자체에 대해서는 아주 낮게 보고 있음.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는 연령 및 거주 지역에 따라 야누코비치 정권에 대한 지지율에 큰 차이가 나타남.

 

- 우크라이나 사태가 해결의 기미 없이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2004년 당시에는 그 세가 미미하였으나 2013년에는 우크라이나 정국의 주역으로 떠오른 극우 파시즘 세력의 영향이 큼. 독일 나치의 우크라이나판 후예임을 공공연히 자임하는 스바보다(자유) 당과, 테러 사용을 주저하지 않으며 역시 그 구성과 조직상 1920년대 독일 나치의 준군사조직과 유사한 행태를 보이는 우크라이나판 나치식 돌격대(Sturmabteilung), 프라비 섹토르(Pravi Sektor)가 이에 해당. 한때 '우크라이나 사회민족주의자당'이라는 노골적인 당명(독일 나치당=독일 민족사회주의 노동자당)과 스바스티카를 당의 엠블럼으로 사용했으며, 당 부설 기관으로는 '요제프 괴벨스 정치연구소'를 설립하며 당의 이데올로기적 지향을 분명히 했던 이 정당의 현재 명칭은 '전우크라이나 자유연합'. 반유태주의와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한 이들의 이데올로기와 과격한 행태는 자유와 거리가 멀며, 이들은 진성 파시즘 정당으로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감. 이 스바보다 당보다 더한 집단이 프라비 섹토르로서, 친서방 성향의 우크라이나 과도정부에 충성하는 우크라이나군조차 무고한 민간인을 서슴없이 저격하는 이들의 행태에 분노하였을 정도.

 

- 우크라이나 사태에 있어 우크라이나 국내 정치의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요소에 대해서 국내외 언론은 제대로 다루고 있지 못함. 이는 현 사태를 서방과 러시아 간 이분법적 패권 경쟁으로 축소시켜, 우크라이나 내부 상황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있음. 우크라이나 사태는 the good, the bad 그리고 the ugly라는 간단한 도식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서부극 같은 것이 아니며, 사태의 진실은 흑백이 아닌 회색에 가까움.  

 

 

3. 크림 사태

 

- 크림의 신임 총리 세르게이 악쇼노프는 1990년대 중반 '고블린'이라는 이름으로 살인과 폭력을 일삼던 갱조직 살렘에 가담했으며, 현재도 그 조직의 일원. 그가 이끄는 '러시아의 통일'당은 지난 2010년 선거에서 지지율 4%에 그쳤는데, 현재 모스크바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러시아와 통합을 이끌고 있음.

 

- 현재 러시아 언론은 유로마이단의 시위를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테러로 묘사하고 있으며, 세바스토폴과 동부 우크라이나에 잠입한 러시아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선동은 현 우크라이나 사태를 민족감정의 대립과 분열로 보이게 만들고 있음. 이에 유로마이단의 민주주의 혁명은 포퓰리즘으로 평가절하되었음.

 

- 크림 반도 병합을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대립은 외견상의 모습일 뿐이며, 본질은 소련 시대에 뿌리를 둔 재산권 분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하나였던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 지역 출신이었던 흐루쇼프가 크림을 행정구역상 우크라이나에 편입시켰는데, 소련 해체 당시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은 크림 영유권 문제를 뒤늦게 정리한다는 뜻) 따라서 크림 사태는 신냉전이나 신제국주의의 도래와는 거리가 멀고, 다만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인해 각자 서게 된 개별 국가들 사이에, 마치 이혼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재산을 분할하듯, 크림 반도의 영유권을 정리하는 것이 그 본질.

 

- 서유럽과 유라시아 국가들은 국민(민족)국가 발전상 상이한 단계에 놓여 있음. 서유럽은 근대국가 주권 영역의 핵심 부분을 초국가 단위에 양도하는 단계에 진입한 반면, 유라시아 탈소 국가들은 근대국가의 핵심 구성 요소인 영토와 국민이라는 문제마저도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단계. 즉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키예프의 정치적 격변(유로마이단 운동과 야누코비치 탄핵) 및 크림 분리주의의 분출을 계기로 근대 민족국가의 미결 과제, 즉 크림 반도를 둘러싼 영토 주권 문제에 직면한 것. 반정부 시위와 야누코비치 축출을 통해 그 계기를 제공한 것은 우크라이나였으며, 그 기회를 틈타 영토 문제를 선제적으로 정리한 것이 러시아.

 

 

4. 노보로시야

 

노보로시야(러시아어: Новоро́ссия) 또는 신러시아(新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역사적 명칭이다. 때로는 러시아의 북부 캅카스 지역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이 지역은 문화적으로 러시아어, 러시아 정교회가 다수를 이룬다. 현대 행정 구역으로 우크라이나도네츠크 주, 루한시크 주,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주, 자포리자 주, 미콜라이우 주, 헤르손 주, 오데사 주, 크림 반도(半島), 몰도바트란스니스트리아, 러시아크라스노다르 지방, 스타브로폴 지방, 로스토프 주아디게야 공화국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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