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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혁명가의 회상 - 크로포트킨 자서전 본문

독서

한 혁명가의 회상 - 크로포트킨 자서전

bravebird 2014. 12. 10. 19:48

 

 

자서전의 백미라는 찬사가 딱 어울리는 책이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이 어린 시절과 관심사와 정치적 신념을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뛰어난 지성과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가졌으면서도 겸손한 태도로 낮은 곳에 임하고자 하는 고상한 인격이, 문장 문장마다 찻잎 우리듯 은근히 배어나온다. 

 

2010년에 타인의 고통과 동정심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집착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읽은 손유경 선생님의 《고통과 동정》이라는 책에서 크로포트킨과 상호부조론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여름 모스크바 여행 때 크로포트킨스카야 역에 자주 출몰하다가,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이젠 직접 크로포트킨 저서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오자마자 빌린 책.


읽다 보니 니힐리즘에 대해 언급이 나온다. 인습, 권위주의, 전제정치, 미신적 관습 등에 대한 반발. 개인주의와 근대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서구주의적 경향. 크로포트킨은 이 니힐리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니힐리즘 경향의 '차이코프스키단'에서 활동했다고도 하는데, 그는 이 단체에 대해서 어떤 정치적 노선을 표방하게 되더라도 도덕적 개인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숭고한 원칙을 고수했던 훌륭한 단체라고 평가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루가 되도록 니힐리즘과 체르니셰프스키와 서구주의와 투르게네프를 깠는데, 크로포트킨은 니힐리즘을 꽤 좋게 평가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크로포트킨을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크로포트킨이 알고 보니《러시아 문학 오디세이》라는 문학사 책도 썼던데, 사상적으로는 대립각을 이룰 도스토예프스키 부분을 뭐라고 썼을지 좀 궁금해진다. 크로포트킨이 워낙 점잖고 선한 사람이다 보니, 사상이 달랐건 어쨌건 대문호로서의 위대함에 주목해서 썼을 것 같다. 

 

크로포트킨과 아나키즘 사상에 대해 새로 알게 된 부분을 조금 정리해 두자면
 - 사회주의 진영은 권력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둘로 나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중앙집권적인 지배 권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도 중앙집권적 권력을 형성해야(=프롤레타리아 독재) 한다고 주장했다. 아나키즘은 이와 같은 접근은 개인 자유를 억압하는 또 다른 지배권력을 옹립할 뿐이라고 본다. 권력에 의한 독재가 아닌,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연대로써 억압을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 코뮌의 실패는 권력이 억지로 배당한 평등 때문. 권력 지배를 제거함으로써 코뮌주의가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과는 다른 입장. 크로포트킨은 생산수단 뿐만 아니라, 사회적 재부 일체를 사회화하자는 입장이었다.
 - 노동 생산물을 노동 시간, 질, 생산성이 아니라 개개인의 필요 욕구에 따라 분배하자고 주장하였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의해 취한다." 이는 임금제도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소박한 양심을 무한히 신뢰한 사람이었구나 싶다.)
 - 상호 부조의 사회성이 인간 생존과 진화의 최대 무기였다고 생각하였다.


책 속에서 흥미롭게 보아 두었던 부분은
 - 투르게네프가 그의 논문에서 인간형을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나누었다는 부분. 햄릿형은 분석적 이기주의자, 신념이 없으므로 의지도 없는 회의주의자, 따라서 그 무엇도 성취할 수 없는 사람. 돈키호테형은 군중의 우두머리, 비록 우둔할지 몰라도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행동력이 있고, 가다 넘어지면서도 나아가 결국 찾아내고 이뤄내는 사람. 투르게네프 주인공은 대부분 햄릿형이며, 투는 햄릿형 인물들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코멘트하고 있다. 햄릿형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러시아 문학을 접하게 된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분석이라 해당 논문을 다운 받았다. (Turgenev, Hamlet and Don Quixote)
 - 영국과 프랑스의 비교. 영국은 노동자 계급과 유산 계급이 작은 타협을 통해 서로 만족한다고 평가. 근본적인 계급 모순을 타파하는 방향보다는, 여가나 재산의 보장과 같은 부차적인 양보 사항에 만족하는 노동 대중과, 운동에 참여하거나 지원하는 부르주아 계급. "영국은 중도 좌파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서로 타협하며 살아왔지요." 반면 프랑스와 남부 유럽은, 부분적 이익이 아닌 근본적 원칙에 관심을 갖는 급진주의적 경향으로,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립하는 형세. 현재까지도 유효성이 있는 비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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