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안나 카레니나 본문
처음 읽은 톨스토이 대장편 안나 카레니나. 도스토예프스키 장편 몇몇은 대학생 때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읽어 내렸다. 이번 톨스토이 장편은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나가는 시점에 읽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둘다 참 절묘한 시기에 만난 것 같다.
▲ 이반 크람스코이 작 ‘미지의 여인’.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갤러리에 묘한 아우라와 함께 걸려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이반 크람스코이와 톨스토이는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화가 미하일로프의 실제 모델이 이반 크람스코이. 미하일로프는 안나와 브론스키가 이탈리아 생활을 하던 중에 만난 화가로, 그는 작중에서 안나에게 초상화를 한 점 그려 준다. 톨스토이가 미하일로프를 통해 바라보았을 안나는 이 그림과 얼마나 닮았을까.
예민한 대학생 시절에는 내가 본 나, 그걸 또 바라보는 나, 그걸 또 다시 분석하는 나와 같은 이중 삼중 자의식과 팽창된 에고의 문제로 골몰하곤 했다. 그때는 사실 내 뒤에 버티고 서있는 사회라는 배경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구체적인 상황 조건을 다 떠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고유한 내 모습이 뭔지 알고 싶었기에 자꾸 스스로를 파헤치고 또 파헤치느라 너덜너덜해지곤 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은 훌륭한 사회 소설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자의식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사람의 내면을 갈기갈기 파헤친 심리 소설의 최고 경지 아니겠는가. 예민하고 생각이 많고 자기 자신에 자꾸 집착하곤 했던 당시의 나와 정확히 파장이 맞았었다. 반면 요즘은 커다란 사회 조직 속에서, 관습의 그물망 안에서 과연 나라는 개인이 얼만큼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모든 구체적인 상황 조건을 떠난 고유한 자아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얼마나 지탱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하곤 한다.
▲ 도스토예프스키 하면 언제나 생각나는 에곤 쉴레 자화상. 2010년 문지문화원에서 민음사판 《지하로부터의 수기》 역자인 김연경 선생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책 표지로 에곤 실레 자화상을 쓰고 싶었지만, 이미 동 시리즈의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의 표지로 사용됐기에 대신 이반 크람스코이 자화상을 넣었다고 하셨다.
학생시절을 끝내고 일을 시작한 다음 한 가지 분명히 배운 것이 있다. 사회는 내 전 인격과 진심을 걸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 모두들 특정 상황에서 특정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상사는 언제나 갖가지 사소한 일로 호들갑을 떨며 닦달을 한다. 그 위의 상사는 매출 실적을 갖고 직원들을 쉴새없이 몰아붙인다. 그렇지만 나도 그 감투를 쓰면 마음이 급해져 결국 비슷한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이 사원 때도 그랬겠는가. 또 집에서는 어떻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사회적 조건과 상관없이 고유한 성격, 고정된 자아란 과연 가능할까? 인간은 단일한 자아가 아니라 상황이, 고정된 성격이 아니라 역할과 역할 수행에 의해 규정되는 것 아닐까? 이런 궁금증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을 때 《안나 카레니나》를 읽게 되었다.
톨스토이는《안나 카레니나》에서 개인의 감정과는 큰 관계 없이 형성 유지되는 결혼 관계, 관계와 정치계의 각종 관습, 그리고 인간관계 제반을 둘러싼 온갖 '역할 수행'의 모습들을 찬찬히 보여준다. 그렇지만 판단의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여, 의도치도 않게 우연과 세파의 격랑에 휩쓸리고 마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저 담담히 그려낸다. 무엇보다, 어머니·아내·귀부인이라는 모든 주어진 궤도를 이탈하여 내적 자신과 사회적 자아를 최대한 일치시키려 했던 안나가 어떻게 파멸하여 가는지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저러한 개인적 희망을 접어 놓고 직업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사회구조의 위력을 전에 없이 크게 체감하기 시작한 나로서는, 결국 자아란 것도 사회 조건의 뒷받침을 받아야 편안하게 발휘를 할 수 있는 거구나 싶어 다소 슬펐다. (아 이렇게 희망찬 학생 세계와 이별하고 조금씩 나이들어 가는 건가.) 아무리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갈망하더라도, 아무리 눈부시게 아름답고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더라도 결국 혼자만의 힘으로 세상에 맞서기엔 역부족이라는 것. 그렇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이 이곳 너머 저 다른 곳을 계속 꿈꾸고 바라보며, 그 중 누군가는 그리로 힘껏 달려가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속마음뿐만 아니라 겉모습까지도 온전히 솔직한 자기 자신이고자 했던 안나의 어려운 용기를 어렴풋이 짐작만 해보았다.
이야기에서 아쉬운 부분은 아무래도 레빈이다. 레빈은 사실 소설 속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세상사에 대해 생각이 많은 진중하고 예민한 타입이면서도 부지런히 생활을 개척해 나가는 남자. 아주 좋아할 수도 있는 인물인데, 그가 자기 사상을 늘어놓는 부분은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농노와 귀족, 철학과 신앙, 가족과 관습, 도시와 농촌... 레빈의 사유는 스펙트럼이 넓지만, 막대한 주제들을 한번씩 건드려 보다가 흐지부지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다. 게다가 안나의 죽음을 그렇게 극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게 보여 주고서는, 그 뒤에 레빈의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사유의 일단이 몇 장에 걸쳐 배치돼 있어서 끝이 확 죽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톨스토이는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세계를 다루는 재능이 탁월하면서도, 그 정반대편에 있는 사변과 교술의 세계에도 그 누구보다 깊이 빠져들 수 있는 신기한 작가인 것 같다. 그렇지만 그냥 감각과 구체의 세계에 집중해 주었으면! 톨스토이 부인이 안나 카레니나 1부를 읽으면서 레빈을 보더니 "레빈은 재능만 빼놓은 당신이네요."라고 말했다는데, 톨스토이랑 같이 사는 건 어쩌면 퍽 지겨웠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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