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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러시아의 민족정책과 역사학

bravebird 2014. 12. 10. 19:39

 

 

3년 전 중국 중앙민족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던 시절 자주 들었던 질문이 "너는 무슨 민족이야?(你是什么民族?)"이다. 중국은 '중화 56개 민족'이라고 엄밀하게 구획해서 관리하고 있고, 개개인의 신분증에 민족성을 표시한다. 그냥 대충 한민족은 한국인이고 한국인은 한민족인 줄 아는 그런 나라에 사는 나로서는 굉장히 신선한, 중국에서나 들을 수 있는 참으로 중국적인 질문이었다.

 

그곳에서 위구르어 수업을 들으면서는 신장에서 온 친구들을 많이 보았다. 회족 학생들이 꽤 많이 있었다. 보통 부모님 중 하나는 한족, 나머지 하나는 회족인데 회족 정체성을 택한 경우가 많았다. 대학 입학이나 공무원 시험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여러 민족성이 뚜렷하게 구별되어 행정적으로 관리가 되고 있으며, 중화민족이 56개 민족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민족 정체성은 직접적으로 신분증에 등장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선택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며 사회경제적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민족성은 중국인 정체성의 상당히 중요한 일부분인 셈이다.

 

중국인들은 민족을 56개로 구획하고 신분증에 똑똑이 적는 만큼, 민족 간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중앙민족대학 근처의 어느 거리에는 56개 민족의 남녀가 전통 복식을 입은 모습이 벽에 그려져 있었고 민족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었다. 이 벽화가 말하고자 하는것은 결국, 이 다양한 구성원들이 중화 대가정(中华大家庭)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나 중화대가정이라는 프로파간다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 중국민족지라는 민족학과 수업을 들어보니, 중화 56개 민족의 복식, 전통 문화 등을 박물관 박제처럼 진열하고 있었다. 민족 카탈로그처럼 구성된 그 수업 교과서의 소수민족 관련 어느 챕터에나 등장하는 말은,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춘다(能歌善舞)는 것이었다. 마치 원주민 비슷하게 피상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차이를 강조하면서 어떻게든 한 가정으로 묶으려는 중국의 방식은 미국의 경우와는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온갖 이민자들이 다 모여사는 미국에서는 인종 간 평등이 핵심적인 화두 중 하나이다. 어느 나라 출신인지 어느 인종인지에 상관없이 colorblind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보고자 노력한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 흑인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 백인 우대 등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최소한 미국 헌법이 추구하는 이상은, 인간을 어느 민족이나 인종으로 보지 않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시민 권리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닌 개인으로 보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권리와 의무 앞에 선 개인으로 보려는 것이다. 민족, 출신국, 성별, 나이 등의 구체적 요소를 애써 지워낸 추상적 개인으로 보려는 것이다.


몇 년 전 미국 사회 교과서로 초등학생 영어 과외를 하면서 느낀 건데, 미국 학생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citizen, community, freedom, equality 등의 아주 심오하고 정치철학적인 개념을 보통 일상어처럼 들으며 자란다. 나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짜리 제자에게 도저히 citizen의 개념을 이해시킬 수가 없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수업은 이미 영어의 문제가 아니었고, 정치와 사회와 역사와 철학의 문제였다. 일단 나부터가 citizen 하면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근대 시민보다, 도시 거주자라는 일상적인 의미를 먼저 떠올리는데, 아직 근대사가 뭔지도 모르는 초등학생한테 어떻게 그걸 이해시킨단 말인가.


그때 한국인과 미국인이 사람과 사회를 보는 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걸 느꼈다. 떠올려 보면, 우리 바른생활 교과서에는 이웃, 우리 마을, 어른, 부모, 친구 등 그냥 한곳에 살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관계 중심적인 용어들이 주로 등장한다. 초등학생인 나와 어른인 동네 할아버지의 관계는, 정치사회적인 권리와 책임을 매개로 하여 형성되는 미국 citizen들이 공적 community 안에서 맺는 관계와 큰 차이를 보인다. 물론, 민족성이나 인종의 요소를 애써 희석시킨 미국의 citizen은, 민족성이라는 요소와 불가분 관계에 있는 중국 공민과도 크게 다르다. 이는 비교적 단순한 민족, 인종 구성으로 인해 한민족이 즉 한국인, 한국인이 즉 한민족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 정체성과도 판이하게 다르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어떨까? (서론이 참 길었다-_-) 러시아에서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중국 못지않게 광활한 영토와 수많은 민족을 지닌 러시아, 공산주의의 맹주로서 수많은 나라들과 연방을 구성했었던 러시아의 상황은 어떨까? 그게 바로 이 책을 읽게 만든 계기였다.

 

러시아는 흥미롭게도, 레닌 시절에는 민족 자결주의 노선을 택했다고 한다. 본래 공산주의 자체가 민족보다는 계급을 우선시하며, 민족주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여기는 사상이었기에 역사 수업을 폐지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신생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보다 현실적인 필요성이 있었기에, 여러 소수민족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민족자결주의 노선을 공식 표방하고 핀란드와 폴란드의 정치적 독립을 허용하였다. '소수민족의 지지를 얻을 목적'이라는 말 자체가 결국 여러 소수민족 간의 실제적인 차이를 이미 인식 및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렇게 여러 차이가 있는 수많은 민족들을 소비에트 연방의 울타리 안에 규합하려는 목적은,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소수민족 해방'과 상충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스탈린 시기에는 대러시아 중심적인 민족 볼셰비즘의 시각에 입각한 역사 교육이 이루어진다. 특히 독소전쟁(대조국전쟁)을 거치면서 소비에트 애국주의를 진작시키기 위한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당시, 정통 마르크스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민족보다 계급을 우선시하거나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자성을 강조한 학자들은 대거 숙청당하였다. 또한 레닌 시절 폐지되었던 역사 수업이 부활하였고,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차르와 구국 장군들의 위업이 긍정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소련이 타도하고자 했던 제정러시아 시절의 역사관과 궁극적으로 상통하였다는 점이 재미있다.


스탈린 사후에는 대러시아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 이맘 샤밀 등의 소수민족 지도자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 당성보다는 학문적 엄밀함을 추구하는 경향, 여러 민족 간의 우애와 융합을 강조하는 입장 등이 모두 나타남으로써 이전 시기의 역사 서술에 비해서는 한층 다원화된 면모를 보였다.


마지막 장에서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분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키예프 루시를 누가 계승했는가에 관한 논쟁, 흐멜니츠키 봉기의 결과로 맺어진 페레야슬라브 조약에 대해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에 대한 논란, 크림 반도 및 세바스토폴 문제 등 지금 이 시점까지도 뜨겁게 진행 중인 첨예한 이슈들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되짚어 주고 있다.


시기별로 나누어진 네 편의 논문을 통해 러시아의 민족 정책과 역사 서술이 대략 어떤 상황에서 무슨 방향으로 변해 왔는지 개관해볼 수 있어서 꽤나 유익한 독서였다. 그렇지만 애초에 품었던 의문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답변을 받을 수 없었다. 앞으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점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갈 길이 멀군.


  - 러시아 사람들은 서로 알아가는 단계에 있어 어느 민족인지 쉽게 물어보는가?

  - 민족 정체성을 어떻게 구획하고 관리하는가? 56개 민족성을 공식 지정하고 그 차이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한 가정으로 묶어내려는 중국의 방식에 가까운가, 혹은 차이점을 가급적 희석시키고 동등한 시민권 앞의 추상적 개인으로 보려는 미국의 colorblind 방식에 가까운가?

  - 소련 시대와 현재 러시아연방 신분증은 각각 어떻게 생겼는가? 민족성이 직접 표시가 되는가?

  - 소련 시대와 현재 러시아연방에는 중국의 경우처럼 민족 학교가 따로 있는가? 각 민족어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 마오쩌둥의 민족 정책은 스탈린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어떤 점이 비슷하고 다른가?

  - 러시아에서도 중국의 소수민족 가산점, 미국의 affirmative action에 상응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가?

  - 각 소수민족 공화국과 중앙 정부 사이의 관계는 어떤가?

 

■ 중앙민족대학에서의 해당 체험과 관련된 글은 여기에

http://eagleoos.egloos.com/225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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