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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스탈린의 선택, 1941년 6월 본문

독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선택, 1941년 6월

bravebird 2014. 12. 10. 12:45

이 글은 제 예전 이글루스 블로그에서 옮겨왔음을 밝힙니다. http://eagleoos.egloos.com/2506930

 


 

 

독소전쟁 관련하여 처음 읽은 책. 몇 개 후보군 중에 가장 얇아서 입문용으로 좋을 것 같아 골랐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간결명료함, 술술 읽히는 서술 그리고 흥미로운 관점으로 2차대전사 입문에 큰 도움을 받았다. 


이번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가면 봉쇄 시기에 대한 걸 좀 보고 오려는 계획이어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대해 미리 조사해 보려고 독소전쟁 내용을 살피고 있다. 이 책의 초점은 레닌그라드 봉쇄보다는 약간 시기가 앞선 것으로, 독일이 애초에 왜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러시아를 침공하게 됐는지 그 원인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당시의 정치외교적 상황뿐 아니라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역사상 가장 개성 강렬한 두 인물의 전쟁 심리를 파고들었기에 마치 소설 읽어내리듯 흥미가 진진하다. 그러면서도 간결명료해서 단숨에 읽어내릴 수 있다. 두 번 정도 읽었는데, 그냥 반납해 버리기가 아쉬워 한번 더 빌려왔다.  


흔히들 생각하는 바에 의하면 히틀러는 나치즘, 반공주의, 반유대주의, 아리아인 우월주의, 러시아 공포증 등의 광신적인 이즘에 완전히 사로잡힌 채 독일 민족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서 러시아 침공을 감행한 미치광이다. 그러나 비이성적 이데올로그로서의 면모에만 집중하여 전쟁 원인을 분석하는 것은 노회한 정치가이자 전략가로서의 히틀러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히틀러는 서유럽 세계에서 반공주의가 먹힌다는 것을 알고 반공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동시에 독일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정치적 수완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 수장인 스탈린과 반공주의자 히틀러는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국 히틀러는 적극적인 태도로 소련에 접근하게 된다. 그는 러시아와의 사이에 있는 동유럽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자 하였으며, 단치히폴란드 회랑을 점령하여 폴란드의 외교정책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어했다. 1939년 2월 말, 히틀러는 그것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 후방에 있는 러시아의 요소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동맹에 끌어들이면 히틀러를 견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독일과 러시아가 양자 간 협약을 맺을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서방 국가들과의 동맹으로 인해 독일과의 힘든 전쟁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히틀러는 이처럼 서방과 러시아의 동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하였고, 폴란드 침공을 실천할 시간이 다가오자 가능한 빨리 스탈린과 조약을 맺기를 바랐다. 스탈린 역시 영국과 프랑스의 접근에는 시큰둥했던 것과 달리, 평소에 그 성공 사례를 감명 깊게 지켜보고 있었던 히틀러의 접근은 선뜻 받아들인다. 


결국 1939년 독일과 소련은 결국 독소불가침조약(리벤트로프-몰로토프 조약)을 체결한다. 이는 독소 간 상호불가침, 그리고 일방국이 제3국으로부터 공격받을 경우 다른 일방국이 그 제3국을 원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불가침조약과 함께, 폴란드와 동유럽 북부를 독소 양국이 분할한다는 비밀문서 역시 조인되었다. 이 비밀분할선에 의해 폴란드의 동쪽 절반 및 발트 3국, 그리고 핀란드까지가 러시아 세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스탈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루마니아에 최후통첩을 하고는 베사라비아와 루마니아 일부 지역을 점령한다. 히틀러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스탈린을 점차 적으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당시 나치 독일은 영국과 대치 중이었다. 처칠은 독일에 대한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서양 건너 루즈벨트와 독일의 배후에 있는 러시아를 믿었기에 독일을 상대로 계속 버티고 있었다. 히틀러는 영국을 좀더 빨리 협상테이블로 불러내기 위한 필살기로서 러시아 경략을 구상하였다. 러시아가 무너지면 영국은 협상테이블로 끌려나올 수밖에 없다고 믿은 것이다. 일반적인 통설상 히틀러는 나폴레옹도 실패한 러시아 정벌을 독일 민족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러시아 침공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히틀러의 주적은 영국이었으며, 궁극적인 목표는 영국의 우군인 러시아를 제거하여 영국을 굴복시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일본이 미국을 봉쇄해줄 것으로 믿었으며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보여준 러시아 군대의 기량이 형편없어 보였기에 단기간 내의 모스크바 함락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독일군 장성 대부분이 러시아 점령을 낙관한 것과는 달리, 오히려 히틀러 그 자신은 어두운 유령선 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할 만큼 러시아 침략에 대해 일정한 두려움을 함께 갖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히틀러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이데올로그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군사전략을 세우고 그 기대이익과 리스크를 이모저모 따져보았던 현실정치가이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러시아는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러시아 국경지대를 침략한다. 당시 스탈린은 히틀러를 굳게 믿었다. 그가 영국과의 양면전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하여 독일군이 국경 지역으로 대거 이동하고 독일군 비행기가 월경하여 자유롭게 날아다니기까지 하던 1941년 6월 22일 바로 며칠 전까지도 여러 가지 경고 신호를 한사코 간과하였다. 독소 간에 전쟁을 부추겨 이익을 취하려는 미국과 영국의 이간책으로 여긴 것이다. 의심은 스탈린의 중요한 성격 특성이었는데, 미국과 영국에 대한 의심이 오히려 독소불가침조약에 대한 신뢰를 부추겨서 러시아가 아무 대비 없이 독일군의 기습을 당하게 된 것이 무척 아이러니하다. 


독일 침략이 현실로 다가온 후, 스탈린은 한때 국가 지도자로서의 의지가 완전히 무너진 멘탈붕괴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처칠은 평소의 반공주의 원칙을 양보하고 자국의 안정을 위해 러시아와 동맹을 약속한다. 이후 러시아는 믿을 만한 첩자였던 리하르트 조르게로부터 일본이 러시아를 공격할 의사가 없으며 대신 남진하여 영국 및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이에 스탈린은 극동지방 주둔 병력을 유럽 쪽 러시아 전선으로 대거 이동시켜 독일에 대해 군사적 균형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독일은 양면전에 처하였을 뿐 아니라, 광활한 러시아 영내에서 예상보다 작전이 훨씬 길어지면서 혹한 및 보급상 난점으로 인해 군사적 타격을 받게 된다. 또한 스탈린은 처칠과 루즈벨트를 기본적으로 믿지 않았지만, 독일이 영미권을 유혹하여 휴전을 맺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잘라 말하였다. 히틀러보다는 처칠과 루즈벨트를 동맹자로 여기는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이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1941년 6월에 처칠이 스탈린과 동맹할 때도 중립을 굳게 지켰던 미국마저 참전하게 된다. 미국은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1945년 초반, 얄타 회담에서 극동지역 대부분을 소련과 함께 분할하는 것에 동의한다. 소련은 독일 항복 후 석 달이 되는 시점에 일본을 상대로 참전하기로 한 약속을 정확히 지키며, 미국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은 완전히 패배한다. 이처럼 2차 세계대전의 종식에 크게 기여한 소련과 미국은 전후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되며, 이때서야 공산권과 자유세계가 분할되어 냉전 체제가 시작된다. 영미권과 소련의 동맹이 이즘의 차이 때문에 깨질 수밖에 없다는 히틀러의 예측은 너무 뒤늦게 실현된 셈이다.  


이 책은 독소전쟁의 자세한 경과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고 있지 않다. 대신 스탈린과 히틀러의 관계 및 전쟁심리, 독일이 독소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소련을 침공하게 된 원인, 이렇게 시작된 독소전쟁이 2차대전의 전개상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간결하고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초심자로서 아주 부담없으면서도 유익하게 읽을 수 있었으며, 이독 삼독해 볼만한 양서이다. 분량이 부담 없어서 원서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번역도 뛰어나고, 마지막 역자 후기를 보면 책 전체 내용을 고스톱에 비유하시는 역자 분의 센스도 일품이다. 이 책 읽으니 키신저의 디플로머시 해당 내용도 다시 읽어보고 싶고, 독소전쟁사,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 레닌그라드 공방전 등등 개별 전투에 대한 여러 책까지 자세히 살펴보고 싶어진다. 굉장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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